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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자리

23. 균형

by 금봉



균형



남이라면, 한 번의 사춘기,

하즈키에겐 몇 번의 사춘기를 보낸

직사각형의 조그만 곳,

겐토의 분노와 친절이 담긴 커튼,

어긋난 발 디딤으로 걸릴 것만 같은

낡은 나뭇결의 다다미,

아크릴로 된 액자 겉면의 상처,

타다요시가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쭉쭉 빨아대면 순식간에 없어질

갈증을 담아내던 양은 주전자,

하즈키의 희망을 담아낸 마네키 네코,

없어도 곁에 있는 것만 같던

핑크 빛 복숭아 냄새를 풍기는 마나츠.


출처 작은집



하즈키는 자신의 작은 침대를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한다.

잠시 눈이 욱신거리더니,

침을 꼴깍, 넘기자마자 고맙게도 멈추었다.

하마터면 불상 사나운 그것을

흘릴 뻔한 생각에

머리가 아찔하고 유치해지는 기분이 든다.


핑크 빛 살 냄새를 지닌 마나츠가

하즈키의 곁에서

내내 쓴 맛이 날 것 같은 숨을 내쉬었다.
결혼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진짜 다른 건 필요 없어,

하즈키 꼭, 하나 필요하다면 침대는 갖고 싶어,

하지만, 꼭 작은 침대이어야 할 거야.”


라고 말하는 마나츠를

하즈키는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살 냄새를 맡았다.

마나츠가 침대의 머리 맡을 쓸며 웃었다.


“그땐, 말이 되는 크기였어.”


마나츠가 좁은 침대 위에 누워

멀뚱히 서 있는 하즈키에게 두 팔을 벌렸다.

하즈키는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그대로 안는다.


“지금도 맞아.”


마나츠가 하즈키의 눈을 흘겼다.


“그런 희망적인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


“알았어, 모모.”


그녀는 하즈키의 어깨를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와의 마주침에서

공기도 채 들어갈 수 없도록 옭아맸다.

한쪽 손은 그의 목덜미를 잡고,

한쪽 손은 침대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남은 공간을 확인했다.

그 몰래 느낀 만족감은 아주 달콤했다.

얼굴을 파묻은 하즈키는

겐토의 짜증 썩인 말이 떠올랐다.


“야, 니들 이럴 거면 같이 사는 게 낫겠다

왜 이렇게 살아?

정체를 모르겠다니까?”


하즈키는 부부라는 위치에서

그녀와 살을 섞고,

깨어나면 죄책감을 느끼거나

사랑과 섹스에 관해

심각한 혼란에 빠지곤 했었다.

부부라는 감투가

자신을 그리도 혼란스럽게 만들었었다는

사실을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에 야 알았다.

결혼과 부부라는 감투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때보다 더 열렬히

그녀를 원했고 어느 때보다

열렬히 그녀를 보고 싶어 했다.


또한 다행이거나, 신기한 건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생각하는

나쁜 남자의 대열에

등극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하즈키는 여전히 마나츠를 사랑했다


“좋네, 오랜만에 모모, 란 소리.”


옭아맨 마나츠의 손가락을 잡으며

하즈키가 먼저 일어나 앉는다.


“자.”


마나츠는 늑장을 부리는 아이처럼

몸에 무게를 두고 버티려 애를 쓴다.


“읏챠.”


“가자 마나츠.”


“그래야지, 아마 미네코의 눈에

불씨가 붙어 있을 거야.”


하즈키가 다락에 넣어 둔

가방을 꺼내 들었다.

덩치만 커다란 가방은

집어넣을 것들이 없어서 인가,

천 조각이 쪼그라들어 있었고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원래의 모양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30년을 보낸 세월의 흔적이

이렇게 담을 것이 없다니,

그녀는 화가 났다.

이곳에서 그의 삶은

가방 하나 채 되지 않았다.


“당신 말이야.”


뭣도 모르는 그는 대답도 잘한다.


“응.”


마나츠는 두리번거리며

끼워 넣을 만한 것들에 눈을 굴린다.


“저거, 저건 왜?”


그녀는 아크릴 액자를 가리키며

왜 챙기지 않느냐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다시 와야 하는 이유 같은 거.”


액자 속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엄마의 얼굴에 대고

눈을 찡긋하며 인사한다.


“흠, 가자.”


계단을 나서는 하즈키의 가방은

너무나 쓸쓸해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그가 일층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마나츠도 따라 걸었다.

미네코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난, 눈만 마주쳐 주고 가려는 거니?”


하즈키는 여전히

미네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마나츠가 빠르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미네코, 아직 시간 있어요.”


마나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깜박거리더니

미네코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돋보기 뒤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분명 눈물이 맺혀 있었다.

차마 떨구지 못해

대롱대롱 달고 있는 듯하다.

몇 년 동안에도 붙지 않던

자식의 정이 그새 붙어 버렸는지 의아했다.


타다요시가 아버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질투를 내비쳤던 그녀다.

대롱대롱 달려있는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

하즈키가 눈치를 챘는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모양새다.

미네코가 빠르게 고개를 휙, 하고

돌리는 순간 뚝, 하고

눈치 없는 눈물은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그와 미네코의 눈이 마주쳤고

둘은 아주 잠시 그렇게 멈춰 섰다.

민망함은 순간 날아가 버렸고,

당당히 돋보기를 벗은 채

제대로 눈물을 닦는 중이다.

그는 어찌할 바라를 몰라

고개를 돌리다가, 머리를 긁적였고,

뒤를 돌아보다가, 아, 하, 휴,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나이를 이상하게 먹고 있어.”


하즈키는 모든 사람들이

가방을 짊어지고 떠날 때

흔히 하는, 자주 올 게요,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뱉고 싶지 않았다.

순간 나오코의 말이 생각났다.


“엄만, 걱정 마 내가 자주 들를 거야.”


하즈키는 생각이 많다 보니

엉뚱한 말을 뱉고 만다.


“나오코가 자주 올 거 에요.”


자신이 말을 뱉고 나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나츠가 미네코를 자리에 앉히며 손을 잡는다.


“미네코, 앉아요.”


미네코는 타다요시가 죽은 이후부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관심을 받은 하즈키를

미워했던 마음이 사그라든 시기도

딱, 그때부터다.


의지할 곳이 사라진 후,

자식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일부라는 것부터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즈키에 대한 마음도

나오코만큼, 절실하진 않았지만,

쑥쑥, 자라났다.

자신이 하즈키였다면,

이라는 입장 바꾸기에 도달했을 때는

나오코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이미 늦어

비비적거린다고 해도

나오코와 하즈키는 벅차했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싫어한다,

라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하즈키는 이제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늘 숨 막혀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평온해 보였다.

미네코는 혼자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물을 닦아 낸다.

붉은 매니큐어가 덕지덕지

사라지지도 못하고 붙어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마나츠는 미네코의 손톱을 보더니

꼭, 깨끗이 지워주고 말겠다며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미네코는 남아 있을 만한

그 어떤 조금의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듯 아주 작게 읊조렸다.


“혼자라면, 넌 분명히

아무것도 챙겨 먹지 않겠지

그런데 간다니..."


하즈키는 다시 다른 곳을 응시하며

그녀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한다.


“지금 보다 더 먹지 않은 일은 없을 거 에요.”


미네코도 약간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마나츠가 미네코의 걱정을

덜어 낼 요량이다.


“내가 자주 가요.”


“그것도 참 다행이고.”


“그 애와는 가깝다고?”


“30분 거리예요.”


“흠, 걱정이야, 뻔하지 않니?

아마도 제 집 드나들 듯할 테 지,

아주 피곤할 거야.”


“집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을 거예요.”


미네코는 그의 말은 소용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겐토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원.”


마나츠가 입을 앙 깨물며

눈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미네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간다고요.”


등 뒤에서 하즈키의 한숨 소리에

잠시 눈치가 보였다.


“걔가 그런다고, 가지 안…”


미네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즈키가 말을 잘라먹으며

낡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책이요.”


“응? 그런데 왜 날…”


하즈키는 무심한 척,

말을 툭 내뱉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시간 보낼 때는

이것만큼 좋은 게 없어요,

이층에도 읽을거리가 많아요

언제든지…”


하즈키는 자신의 방을 이층이라

표현하며 들어가도 좋다,라는

간접적인 허락을 내비쳤다.

자신이 문을 잠가 놓고 떠나도

그녀의 열쇠 꾸러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녀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미네코가 책에 코를 박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 모습은 그녀가 타다요시를

얼마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꼭, 블랙 니카 향이 나는 것 같구나 고맙다.”


하즈키는 엄마가 죽고 나서

타다요시가 그녀의 모든 물건들을

없애 버리거나, 태워 버렸을 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아이였지만

그땐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미워도 했다.

그가 유일하게 남긴 엄마의 사진 한 장,

그리고 그녀가 늘 입고 있던 진주 색 가운.

시간이 흐르기만 바랬던

그때 최고의 약은 책이었다.

하즈키에겐 그 어떤 약 보다

효과 좋은 신경 안정제였다.

미네코에게 그 책은 아마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가 책을 휘리릭,

소리를 내며 먼지를 날린다.


마침 볕이 내리쬐는 바람에

온갖 세월의 먼지가

훨훨 날아다니는 중이다.

어김없이 하즈키는 재채기를 연발한다.

코 끝이 붉어지며

묽은 콧물이 흐르기 직전이다.

책을 잡고 있는 미네코의

주름진 손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네코의 손등을 자세히 들여 보기가 처음,

정말이지 말 그대로 폭삭,

늙어 버림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순간, 그녀의 손등은

세월 먹은 진짜 엄마의 것, 같아

그의 목 울대가 밑으로,

다시 위로, 다시 밑으로

내려가며 숨을 삼켰다.


출처, 아수라처럼



“이제 가야 지.”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충혈된 흰자위를 붉게 가득 메웠다.

하즈키는 외면하고 싶어

발이 먼저 삐죽, 나가려던 것을

꾹, 하고 참았다.

미네코는 쇼를 안을 때처럼

두 팔을 들어 올리다가

한 팔만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미네코의 팔은 꼭, 새털처럼 가벼웠고

가느다란 눈은

노-멘(能面가면, 탈) 같았다.


“끼니 거르지 말고,

아주 가끔은 소식, 전해 주렴.”


“그럴게요.”


마나츠가 끼어들어 재촉하기 시작했다.


“자, 어서 가자 늦겠어.”


하즈키의 발은 이미 가방과 함께

문을 나섰고, 마나츠도 따라나선다.


“다녀올게요, 미네코.”


마나츠는 마치 자신이

다시 돌아올 집처럼 말을 한다.

배려 가득한 그녀의 말투는

언제 들어도 친절하다.


미네코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오코 방 창문 앞에 서서 넋을 놓았다.

나오코는 하즈키가 밖을 나설 때마다

그 자리에 심어진 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

바깥 계단을 사용할지

1층 문으로 들어올지를 확인하며

미리 거울을 보거나

또는 놀라게 하거나, 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었다.


물론 결혼 후,

서로 맞닥뜨릴 일이 줄어들면서

그 행동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당연히 미네코는 그걸 모를 리 없었고,

나오코가 서 있던 그 창문에 서서

외로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손등을 바들바들 떨고

떠나는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마나츠가 그녀를 올려보며

손을 흔들었지만 눈만 깜박일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하즈키는 타다요시의 집과

멀어질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마치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미네코는 자신의 방 한 구석에 놓인

진주 색 가운을 보고,

또 한 번 놀라 헙, 하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즈키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는 감정놀이에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미네코에게 잔 정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진주 색 가운 하나로,

타다요시에 대한 욕심과

남의 자식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감에

늘 시달렸었다.

그 세월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아니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제 그 따위 감정을 부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가슴 한편에 몰아 두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이

한꺼번에 툭, 하고 터져버렸다.


그녀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고,

온몸에 자리한 눈물을

한참 동안 토해냈다.





마나츠는 조용히 그를 따라 걸었다.

하즈키는 혼란스럽다.

왜 자꾸 가슴이 욱신거리는지,

그녀의 주름진 손등은

왜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그의 걸음은 마나츠의 복숭아 냄새도

잊고 재촉만 한다.

갑자기 어디선가 음식의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욕지기가 나올 만큼 눈물도 찔끔거렸다.

하즈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며 또 한 번 잊고 있던

마나츠에게 말했다.


“앗, 마나츠.”


마나츠는 한참, 기다렸어,라고

말하는 표정을 지으며 달려와

그가 내민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여전히 그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한참을 그의 눈을

놓치지 않으려 마주했다.

그가 먼저 눈을 놓는다.


“가자.”


“응.”


마나츠가 잡은 손을 다시

바꿔 깍지를 끼우더니

그녀의 감정과 같은 통증이 생길 만큼

꽉, 움켜쥐었다.

코끝이 찡해지도록

쓰레기통의 독한 음식 썩은 내가

내심 고마웠다.

저절로 그들의 코는 꼭, 같이 발개졌다.


빡빡하게 적어 놓은 주소와 경로,

어린이 지도 책을 보는 것처럼

완벽했고 알아보기도 쉽다.

얼마나 정확하고 또렷해 보이는지

한눈에 쉽게 들어왔다.

나오코의 그림 솜씨를

썩이고 있는 게 내심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늘 과하게 하즈키에게 관심을 둔다.

마나츠가 나오코의 결혼식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나오코도 가정을 꾸리니까,

아마 내가? 그랬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거야.”


어처구니없는 말에 불과했다.

마나츠의 말 대로

잠시 소강상태는 보였으나,

나오코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에게 보이는 관심의 압박감은

더해지면 더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계획은 나오코도 겐토도

모르는 곳에 머무르려 했었다.

겐토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나오코에게 말해 버렸고,

그 고집으로 결국 지도를 그려 놓은

우편물을 받게 되었다.

멀 어떻게 해도 그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웃음이 나오는 건 그도 이젠,

이것 즈음이야, 그럴 수 있지,

알았다,라고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습관처럼 말이다.

그는 나오코를 떠올리자

온몸의 기운이 쑥, 빠지는 느낌이다.

그가 고개를 도리질 친다.


마나츠가 싸준 도시락의 손수건을 풀었다.

어찌나 매듭을 꼼꼼하게 해 놓았는지

푸는 데만 시간이 훌쩍 간 기분이 들었다.

마나츠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유부초밥이다.

유부 겉면에 흐르는 윤기는

유리알 같이 반짝거렸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양이

하나만 먹어도 위가 만족할 것 같다.


여러 가지 알록달록 채소 반찬은

아마도 미네코의 솜씨일 것이다.

다른 플라스틱 통에는

마치 자로 재 놓은 것처럼

크기가 같은 달걀말이가 들어 있었다.

하즈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계란의 비린 냄새가 정겨웠다.

유부 초밥을 먼저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어 본다.

씹자마자 나오는 유부의 기름진

즙이 쭉, 하고 혓바닥 전체를 감싼다.

밥알이 반 정도 남았을 때

함께 씹어 먹는 절인 무는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츠키가 챙겨 준 작은 술병도 꺼내 들었다.


“잊지 않았어, 이츠키.”


병 채로 입을 벌려

조금 많은 양을 들이붓고

두 번 걸쳐 꿀꺽 삼켰다.


“크아하.”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창밖에 뚱뚱한 삼각형 산이 가까워졌다가,

점점 그를 멀리한다.


마치 기차가 아닌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아

잠시 멀미가 밀려왔다.

다시 절인 무를 입에 쑤셔 넣으며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는다.

역시 이츠키의 술은

하즈키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놓기에 이르렀다.

마지막 남은 달걀말이를 꺼내 들어

혼자만의 축배를 끝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이다.

어디선가 감칠맛 나는

익숙한 나무 향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코를 자극했다.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나무 향의 끝은 너무 달콤해서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이다.

믿어지지 않아 제대로 형체를 보기 위해

눈을 비비고, 무릎을 굽혀 일어선다.


정말 나무 냄새의 주인은

그가 상상하고 있던 마네키가 확실했다.

그녀는 캄캄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캄캄한 밖의 어둠덕에

그녀의 모습이 유리창으로 보였고,

실내의 불빛은

그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서

캄캄한 창문에 갖다 대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즈키는 간절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좀 더 귀 기울여 보았지만 소용없다.

순간 유리창에 비친

그녀와 얼굴이 마주쳤다.

눈을 서로 마주쳤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그는 빠르게 좌석에 앉더니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무릎에 푹 파묻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조금씩 들어 올려 보았다.

눈을 치켜올린 순간

그녀가 자신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네키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더니

그의 코와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그 힘은 어찌나 거칠고 강했는지

그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납작한 모양의 돌을

찍어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서히 숨이 모자라기 시작했고

눈동자에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반항도 몸부림도 칠 수가 없었다.

또렷했던 후각과 시각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고

마네키의 형체도 더 이상 알아볼 수가 없다.

힘을 주어 눈을 더욱 위로 치켜떠 보았다.

먼지가 늘러 붙어 있는

통풍기 같은 모양의 직사각형이

눈에 들어왔다.

늘러 붙어 있는 먼지는

회색으로 물들어 진득해 보일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남자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울리는 목소리에 정확한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풀리고

온몸의 혈액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핏줄을 타고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움직일 수 없던 팔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드디어 마네키의 하얀 손목을 잡았다.

어찌나 차갑던지 하마터면 손목을 놓칠 뻔했다.

눌려 있는 손수건 사이로 숨구멍을 찾아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네키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저 손에, 그냥, 죽어버려 줄까.’


하즈키는 마네키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다시 천장에서 아무 감정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눈을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은 눈이 번쩍 뜨였다.

흰 자위가 붉게 핏줄이 터져 있는 모습이다.

몸은 축축했고,

머리에서 흐른 땀은

입 속을, 귓속을 타고 들어가고 있었다.


빛나는 갈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단 한 번을

깜박이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는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천천히 일어서서 좌석을

구석구석 확인했다.

그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다.

그녀가 앉았던 곳엔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새하얀 백발을 하고

마치 죽은 듯 잠이 들어 있었다.


“하, 이런.”


그제야 꿈임을 직시하고

허탈하게 털썩 주저앉았다.


“잡을 수 있었는데, 지독하군.”


마네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는

기억 속에서 왔다 갔다, 를 하며

그에게 아는 척을 한다.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세 번째 목소리,

남자는 이번엔 정확한 발음으로

도쿄 역을 말했다.

땀이 흘러 허벅지에 붙은

청바지가 영 불편하다.

축축한 청바지는

자신의 요새에 처음 내딛는

그의 기분을 더럽히고 말았다.


“후 우아.”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에도

어김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걷는 방향은 일정하지 않았고,

뒤죽박죽, 서로가 엉켜

누가 함께 길을 걷는 사람인지

누가 홀로 걷는 사람인지 인식할 수 없다.


그는 목과 어깨의 긴장을 가라앉혔다.

천천히 걸으려 해 보지만

일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걸음에

자꾸 밀리고 또 밀려난다.

어렵게 역 앞을 빠져나와

뒤를 돌아서서 역 전체를 눈에 담아 보았다.


붉은 벽돌은 어둠 속에서도

자기 색을 잃지 않고

자신감 있게 우뚝,

커다란 형체로 서 있었다.

미군의 대공습으로

일부가 불에 탔다는

타다요시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의 붉은빛,

묽은 액체의 고통이

이곳을 물들였을 것이다.

붉은빛은 사라졌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왜 하필,

벽돌의 색깔은 붉은색일까,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감정의 씁쓸함은

입 안까지 텁텁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첫걸음을 뗄 때

부모의 감정은 뱃속에서 방금 태어난

아이에게 느끼는 경이로움과 같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겪는

성장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 누구보다

더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된다.


쇼는 3월생 임을 뽐내 듯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남달랐다.

완벽한 걸음을 하기 시작한 쇼는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씹고 물어뜯었다.

쇼의 키를 넘지 못하는 곳의

물건들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탈이 나 있는 모습일 것이다.

덕분에 그들의 집안 물건들은

쓰지 않은 방에 쳐 박혀 있었고,

아무도 살지 않은 집처럼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오코는 자신이 꾸며 놓은,

또는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아이가 헤집어 놓을 때마다

가만있지 않았다.

쇼가 짜증을 부리며

더욱 난리를 치는 것처럼 꼭,

같이 그녀도 신경질을 부렸다.

겐토는 늘 입이 닳도록 말했다.


“나오코, 모든 아이들은 다 그래,

당신은 쇼와 똑같이 굴고 있어

이건 아니잖아.”


결국,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물건들을

치울 수밖에 없었고,

텅 빈 거실은 늘 적막했다.

겐토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쇼를 빗대어 핑계를 대거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나오코를 늘 지적하곤 했다.


싸움은 그런 방식으로 늘 시작된다.

이번엔 아예 쇼의 장난감마저

치워버린 상태였다.

거실은 이사를 꼭 해야만 하는

집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텅 빈 거실에 앉아있는 쇼는

마치 인형과 같았다.

겐토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소파에 내던지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쇼, 이리 와.”


두 팔에 안긴 작은 몸은

더욱 움츠러들어 있었고,

눈가는 언제 울었는지

소금기를 머금은 하얀 얼룩이 선명했다.


“아빠, 아빠.”


쇼는 아빠의 존재를 확인하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불안한 심리에 엄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빨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식탁을 닦으며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인다.


“왔어요? 얼른 씻고 와요.”


나오코는 마치 충고하지 마,

라고 웃음으로 미리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존댓말의 상냥한 인사는

침을 꿀꺽 삼키듯,

꼭 할 말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차분히 말을 뱉는다.


“응 그럴 게.”


앞치마를 목에 두른

나오코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왠지 그녀의 앞모습은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습관처럼 삐뚤어진 생각만 드는 건지,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젓는다.


“휴…”


작은 외마디 음성에

그녀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지만 이내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인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쇼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쇼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녀석.”


겐토는 다시 쇼를 안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아빠, 아빠.”


여느 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국산 침대 위로

쇼를 내려놓으며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쇼, 아빠가 씻고 나올 동안 기다려 줄 거지?


쇼의 눈동자는 너무 깊고 맑아서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찡, 하게 아려 온다.

아이의 얼굴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으응, 이힛.”


“착한 아들.”


겐토는 쇼의 눈두덩이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쇼는 겐토의 볼을

작은 두 손바닥으로 움켜쥐며 반겨주었다.

쇼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자, 운명이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급하게 만들까,

비누 칠 하는 그의 손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고,

물기를 닦는 수건을 걸지도 않은 채

휙, 하고 던져 버린다.


“아차.”


나오코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시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곱게 걸어 놓으며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인지 그들의 대화는

열 마디 이상 되지 않았다.

무언가 설명할 때에도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고

늘 고개를 숙이거나

쇼를 바라보거나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따라 나오코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여느 때처럼 미간에 주름도

사라진 상태이고

겐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말이다.

얼마 만에 보는 그녀의 웃는 얼굴인지,

겐토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오코가 푹 익은

생선 살을 발라 쇼의 입 속에 넣어 준다.


“당신도 먹어 봐요,

생선찜은 처음인데 어떨지.”


쇼는 생선 살을 더 달라며 안달이다.

나오코는 보채는 아이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눈두덩이가

잠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빠르게 안정을 찾으며 미소를 비친다.


“쇼, 보채지 말랬지?

얌전히 기다리면 줄 거야.”


“나오코, 정말 맛있어

당신 음식은 늘 훌륭해.”


그녀가 젓가락으로 집은

생선 살을 쇼에게 내밀자

쇼는 입 보다 먼저 손을 갖다 대며

생선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겐토는 불안하다.


“쇼오오.”


겐토가 빠르게

쇼의 밥그릇을 당기며 말했다.


“나오코, 내가 할 게.”


쇼는 보란 듯이 입을 쩝쩝,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었다.

나오코의 젓가락에 걸린

흰색 생선 살은 겐토의 밥 위로 올려졌다.

불안함과 행복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고마워.”


그들의 대화는 열 마디를 훌쩍 넘었고

간혹, 웃음소리도 들린다.

쇼는 서툰 젓가락 질을

기어코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식탁 위에 밥풀과 생선이 툭툭,

떨어져 너저분하다.

참다못한 나오코는

작은 목소리고 쇼를 다그쳤다.


“쇼, 뭐 하는 거야?

젓가락을 쓰려면 제대로 해야 지?”


“아이고, 아들.”


겐토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겐토가 식탁에 떨어진

생선 살을 쇼의 입에 넣어 주자

그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겐토, 더럽게 뭐 하는 거지?”


그는 정말 놀랐는지

두 어깨가 위로 솟아 있었다.


“아, 놀랐어 나오코 왜 소리를…”


“그걸 아이한테 먹이면 어쩌자는 거야?”


“더럽지 않아.”


겐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고 있었다.

쇼는 아는지 모르는지

식탁 위에 너저분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주워 먹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더니

쇼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쇼오, 똑바로 먹지 못해?”


쇼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동그란 모양을 하고

공포스러움을 가득 안고 있는 모습이다.

겐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해.”


“뭐? 뭘 그만해?

당신이야 말로 그만해.”


“나오코, 쇼오가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한 거야 몰라서 그래?

쇼는 어린 아기라고”


쇼는 입 안에 든 음식을

더 이상 오물거리지 않았고,

두 손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생선 살을 입으로 가져가며

눈을 치켜뜨며 그를 보았다.


“난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날아갈 것 같아 그러니까…”


나오코는 더 이상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며

검지 손가락으로 엑스를 그어 보인다.

쇼의 눈 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쇼를 다독여 준다.

쇼는 한번 울음이 터지기 시작하면

나오코의 눈이 붉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겐토는 먼저 쇼의 손을

손수건으로 말끔히 닦이고

다시 밥을 먹여 주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쇼는 금세 안정을 찾았고

먹이를 물고 온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처럼 겐토를 보았다.

쇼는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음식을 삼키지 않고

급하게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쇼, 천천히 꼭꼭, 씹어야 지?”


나오코는 아이가 밥을 먹을 때마다

보채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늘 쇼의 밥그릇을 뺐었다.

물론 겐토와 밥을 먹을 때는 예외였고

그 광경을 그에게 지적당한 후

심한 싸움을 했고

그렇게 사라진 일이었다.

하지만 쇼에게 식탁 위는

나오코가 밥그릇을 빼앗는 곳이라고

머릿속에 박힌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이 아니면 맛있는

생선을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겐토는 밥을 꼭꼭 씹어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오늘도 겐토의 밥그릇에는

밥이 그대로 남았다.


식사를 끝낸 쇼는

아빠의 다리 사이를 벗어나지 못했고

바지를 쭉쭉 빨아대고 있다.

그 모습을 또 그녀에게 들킬 까,

쓰지 않는 국자를 집어 들어

쇼의 손에 쥐어 준다.

쇼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함박, 웃었다.


전쟁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났으니

겐토는 한시름 놓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한다.

그녀가 일어나 앞치마를 풀며

개수대에 그릇을 집어넣었다.

나무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신경질적이다.


“내가 할 게 나오코.”


들은 척도 안 하는 나오코는

말없이 그릇과 실랑이 중이다.

겐토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쇼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럼 쇼는 내가 씻길 게.”


나오코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짜증 내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응.”


겐토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가도

그녀 또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때면 금방 수그러들었다.

나오코가 노력한다,라는 것은

아직 그에게 애정이 남아 있다,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정이 없었다면

노력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늘 축, 처져 늘어져 있는

어깨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기가 싫었다.

겐토는 오랜만에 쇼를

번쩍 들어 올려 거울 속에 자신을 확인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를 시작할 수 있다,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되새기고 있는 중이다.


하늘색과 파란색이

섞인 바둑판 식 타일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다.

맑은 물을 담아 그 속을 들여 다 보면

마치 보석을 쌓아 둔

바닷속 같이 반짝거렸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공간을 가득 메우고

습기가 들어차기 시작한다.

쇼는 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다.

욕조에 물을 받는 순간부터

쭉,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하고 있다.

쇼는 원래 이렇게 웃음이 많은 아이다.


알몸이 된 쇼를 들어 올릴 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아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꼭, 한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도 될 만큼

낙엽 한 장 만한 느낌이다.

물속의 쇼는 마른 가지처럼 앙상했다.

아이는 겐토를 바라보며

심장을 찡하게 만들만할,

맑은 웃음을 지었다.


쇼는 코스모스 같은 손으로

물 위를 찰싹, 찰싹 때리며

소리를 낸다.

코스모스가 부서질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지금 아이는 행복하다.

그는 밥그릇을 뺏길까,

급하게 밥을 먹어 치우는 쇼의 입과

앙상한 가지를 훑어보았다.

젓가락을 집고 있던 쇼의

가느다란 팔목의 떨림을

생각하며 또 훑어 내려갔다.

심장의 울렁거림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터져 나오지 못할 분노와 울음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만 같다.

숨을 쉰다는 것,

울음이 나올 것 같다는 것, 에

죄책감을 느꼈다.

가라앉지 못할 것들이 있는

심장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자격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프아하…”


쇼는 앙상한 팔로

물 위의 장난감을 공격적으로

이리저리 쳐내고 또 쳐냈다.

팔의 휘둘림은 정말 쇼의 팔이

부러질 것 같은 세기였다.

장난감을 향해 힘 있게 내리치는

아이의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겐토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쇼, 쉬… 쉬… 가만가만.”


쇼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 울음이 터지면

나오코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가던

그 눈동자다.

아이의 코스모스가 망가질 게 분명하다.

천천히 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늘 그랬든 저항하는 아이의 힘은

깡 마른 팔이 낼 수 있는 힘의

정도가 아니었다.


“쇼, 괜찮아 쉬… 괜찮아 괜찮아.”


아이의 이유 없는 발작은

쇼가 성장할수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그 횟수는 점점 더 잦아지고 있었다.

아이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눈동자의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쇼의 눈은 매서웠다.

그는 이대로 멈추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다.

쇼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고 있었다.

아예 버둥거리던 쇼의 팔을

툭, 하고 놓아 버렸다.

그의 어깨가 빠르게 들썩거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긴 시간을 흘러 보낸 후 귓속으로

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아빠, 아빠 울 어요?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굉장히 안정된 자세로

겐토의 볼을 만지작거린다.

쇼의 코스모스가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모습이다.

어눌한 쇼의 말은

정확하게 그의 귀에 들어온다.

그가 아이의 팔을 놓아 버린 후,

아이는 스스로 발작을 멈추었다.

기억을 하는지 모르는지

다시 쇼의 웃음은

겐토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니, 쇼 이것 좀 봐.”


그는 세수하는 듯

얼굴에 물을 마구 뿌려 댔다.

신이 난 쇼도 물을 뿌리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쇼오?”


“응.”


“아빠 아들, 쇼.”


“응.”


“사랑해 아들, 이리 와.”


겐토의 품에 안긴 쇼의 몸은

까만 머리통만 보일 뿐,

작게 사라졌다.

아이의 코스모스가

겐토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용서한다, 용서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는다.'


곤히 잠이 든 쇼의 모습은

마치 천사 같다.

짙고 길게 빠진 속눈썹은

나오코의 것과 꼭 같았다.

그녀의 어릴 적 눈매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길고 가느다란 눈매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로 점점 변해갔다.

쇼의 성인이 된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튀어나온다.

쇼는 잠시 뒤척이다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젖을 빨 듯 쪽, 하는 소리가

나도록 빨아댔다.

인상을 찡그리며

짜증 섞인 신음 소리도 낸다.

쇼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지만

굉장히 불안해 보였고,

그가 자리를 뜨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뜰 것 같았다.

겐토는 모로 누워 쇼를 꼭 끌어안았다.


쇼의 심장소리는 목으로

툭툭, 튀어나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겐토는 크게 하품을 하며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빠르게 뛰던 쇼의 심장은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입 안에 품은 엄지 손가락은

퉁퉁 불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유난히 큰 쇼의 엄지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며 만족감을 느꼈다.


“아빠 손가락이랑 닮았네?”


갚은 잠에 빠진 쇼를 바라보며

내일은 조금 덜 아프길,

기도하며 욕심을 부려 본다.


“내 아들, 사랑한다.”


쇼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쇼는 마치 달콤한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의 눈이 달콤함에 취해

조금씩 눈이 감기는 찰나,

갑자기 사방이 희 뿌연

그림자로 바뀌었다.

눈이 부셔 눈은 더욱 감겼다.

나오코는 잠든 쇼를 배려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다행히 켜진 불에 눈을 살짝 찡긋할 뿐,

깊은 잠이 쇼를 다독였다.

겐토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나오코가 선수를 친다.


“맥주, 준비했어.”


그는 그녀에게 말할 것을

포기하고 쇼가 깰까,

빠르게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그녀의 어깨를 밀치 듯,

나가 방문을 조용히 닫는다.


겐토는 다시 화를 말하고 싶었지만

노란 불빛의 조명을 받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포기해 버렸다.

그의 포기는 일상 속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그녀의 모든 것이

눈이 아플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꼭, 담배와 같은 그녀의 존재.


그녀가 몇 날, 며칠을 고르고 골라

선택된 작은 식탁,

그 시대의 원형 식탁은

보기도 힘들뿐더러,

갖게 된다는 건 선택된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물건의 출처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아끼던 그림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질 않았다.

애지중지하던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이 골동품(원형 식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형 식탁의 다리는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가늘었고 굴곡은 그녀의 허리처럼 매끄러웠다.

그에겐 조금 낮은 키였지만

나오코가 앉아 있는 모습은

여간 잘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마치 영화 포스터에서나

볼 법한 한 장의 그림이다.


그날의 그 그림도 아름다웠다.

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길게 뻗은 다리는 살색의 정점, 이라고

할 만큼 매혹적이다.

겐토는 붉은 입술 보다

그녀의 짙은 눈썹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커다란 눈을 위로 떴다 아래로 내릴 땐,

그녀의 눈썹을 입 속으로

흡입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잘 익은 녹색 콩이

그녀의 입술을 거쳐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식탁 위에 올려진

녹색 콩을 질투한다.

탁해 보이는 맥주가

그녀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나오코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권한다.


쨍, 하는 소리는

겐토의 목소리처럼 소심하다.


“다시 맥주가 어울리는 계절이야.”


그녀의 짙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겐토의 엉덩이가 움찔한다.


“응.”


그녀의 맥주잔이 유난히 탁해 보인다.


“쇼를 안고 생선을 사러 갔어,

내내 땀으로 뒤범벅,

유모차를 잡은 손까지 미끄러지고…”


“다칠 뻔한 거야?”


나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가까운 곳에서 사.”


그녀의 눈썹이 다시 위로 올라가며

갈매기 모양을 만들어 낸다.


“당신도 쇼도

무척 힘들었겠다 날은 덥고.”


겐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다.


“쇼는 보호를 받으니까 괜찮아,

난 정말 힘들었어.”


그가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그의 오늘도 라는

단어 선택에 나오코의 얼굴은

한결 더 들떠 보였다.

그녀가 가운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또 덥기 시작해.”


민소매로 된 흰색 상의는

그녀의 몸에 맞게 제작된 것처럼,

그녀의 몸인 것처럼 들러붙었다.

덕분에 풍만한 가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는 콩의 껍질을 까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부터,
머리 목덜미 가슴 허리 마지막으로

발등, 부쩍 살이 오른 나오코의 모습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쇼의 마른 허벅지와 팔이 대롱거린다.

겐토는 콩을 집어먹으려 다

그녀의 오른 살집에 비위가 상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땐 가득 찬 맥주를

한 번에 털어 넣기 란, 참 쉬운 일이다.


“나오코, 당신은 요즘 부쩍 살이 올랐네.”


“그래?”


그는 자신의 입 꼬리가

한쪽만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는다.


“보기 싫다는 거?”


“아니 그런 뜻 아니야.”


“뭐, 속 뜻은 당신만 아는 거니까.”


나오코가 그의 말을

그대로 듣지 않고 자신 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었다.

그녀도 따라 가득 찬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나오코, 당신은 아까운 사람이야,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란 얘기야?”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되나…”


“글쎄, 동의하기 힘든 말이네,

과연 내가 당신과 쇼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분명 집착은 더욱 강해지고

바닥을 파고 또 파는

삶을 살았겠지.”


그는 뜻밖의 대답,

쇼와 자신을 만난 삶이 더 낫다고,

그녀는 지금 말하고 있다.

개수대 옆, 젓가락을 담아 놓는 곳에

삐죽이 튀어나온 쇼의

플라스틱 젓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유난히도 삐죽.

그녀가 발개진 겐토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취한 거야?”


“취한 긴.”


나오코는 길게 뻗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녀가 담배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저 물건을 끊어야겠다,

라고 굳게 다짐한다.

겐토가 말했다.


“후, 당신?

내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의 모든 금지된 언어로

그녀를 못살게 굴고 싶었지만,

쇼의 울음바다가 되길 원하지는 않았다.

겐토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오늘 좀 달라 보여.”


“그게 다야?”


그는 다시 맥주잔을 순식간에 비워 냈다.


“왜? 무슨 날인 가?”


겐토는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나

반 틈 열린 창문을

아예 모두 열어 놓고 커튼까지 밀쳐 놓는다.

어둠 속으로 뿌연 연기가

공기를 타고 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


며칠 전 하즈키와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시계를 내려다보며

하즈키가 말했던 날짜가

오늘임을 눈치챘다.

그가 말했다.


“오늘이 군.”


그는 등을 완전히 굽히고

의자에 드러누운 것처럼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내가 깜박했네,

근데 이 자식 연락이나 주지.”


나오코는 그가 묻기도 전에 자식을 칭하는 건

하즈키라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걱정이야.”


겐토는 때론 그녀가 거짓말을 해 주길 바랐다.


“걱정은 무슨,

술을 먹고 뻗었거나…

마나츠와 함께 있을 거야 아마.”


그녀는 미간을 움찔하거나,

눈을 쓸데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주 기분 나쁠 때나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나오코의 기분이 망가졌을 게 뻔했다.

겐토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쇼 걱정이나 해,

그 자식 잘 도착했을 거야.”


“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 있을 게 있어,

걱정 말라는 그냥 그 말이야.”


겐토는 사막 한가운데 서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소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늘 상대방을 화나게 해

당신이 하는 칭찬도

기분 나쁘게 들려, 알아?”


“아, 나오코

당신도 알다시피 또 오해야.”


“그래? 당신이 하는 말의 속은 뻔해.”


“제발, 나오코.”


그녀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빠르게 뿜어낸 연기는

길을 찾지 못하고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오늘만큼은 최선을 다하자

마음먹었는데,

나를 죄지은 사람 취급하는

당신을 보면 모든 게 다시 돌아가.”


나오코는 조금 아픈 쇼를 낳은 자신이

늘 죄를 짓고 있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점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의 말투,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색을 하는 그의 표정은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고

때문에 나오코도 솔직히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게 아니라고 하겠지

그럼 난 지금부터 무조건

예스,라고 말해야 되는 거야,

그런 가?”


그는 대체 누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은 계속 다른 말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나오코는 점점 힘 빠진 목소리로

화가 수그러들고 있다고

나름 표현하고 있는 중이다.

이 또한 자주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나오코가 중얼거렸다.


“늘 결론도 없는 말장난.”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작정이다.

또 다른 마음속의 겐토는

속으로 말해버려,라고

몇 번을 외쳤는지,

수십 번을 돼 내이고 나서야

입술이 열렸다.


“나오코.”


그녀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나쁜 소식이 아니길.”


겐토가 손바닥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한다.


“쇼, 를 병원에 데리고 가자

다른 곳으로.”


그는 두 손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그를 바라보지도, 말도, 움직임도 없다.

계속 타 들어간 담뱃재가

길게 줄을 잇고 있었다.

잊었는지 손가락에 힘이 풀렸고

길게 이어진 담뱃재가 뚝, 끊겨 버렸다.

남은 담배는 손등에 그대로 안착했다.

생선 살을 떨어뜨린 쇼를 보고

꾸짖는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앗, 젠장.”


“괜찮아?”


겐토가 빠르게 그녀의 손을 들어

툭툭, 털어내지만 이내 뿌리치는 그녀다.

불씨가 남아있는 그것을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짓이긴다.


“쇼는 괜찮아.”


“나오코.”


“괜찮아.”


“말이 안 되는 거 알고 있잖아, 응?”


“쉬, 조용히 해, 제발.”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달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꼭, 답답한 자신의 미래와 같다, 란 생각이 든다.

나오코는 모자란 술을 위스키로 채울 생각이다.


“우린 병원에 다녀왔고,

다시 병원에 갈 일은 없어.”


“다른 길은 꼭 있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거야.”


“당신은 내가 쇼를 포기한 거라 생각하지?”


나오코는 위스키를 따라 낸 잔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다른 잔을 고르는 중이다.


“난 쇼 엄마야,

난 또다시 아이를 두고

그 끔찍한 말… 들 듣고 싶지 않아,

어떤 병원에도 다시 갈 일은 없어.”


“나오코…”


“다른 길은 없어 겐토.”


40도가 넘는 위스키가
식도를 지나가면서

속도에 불이 붙었는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타 들어갔다.


“하압 하, 당신만 아픈 거 아니야.”


겐토는 할 말을 잃고, 어둠만 응시한다.


“어차피 완벽한 삶은 없으니까,

쇼는 괜찮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조금 부족한 것뿐이야.”


그녀가 생각하는 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가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다는 자신에 관해서,

삶에 관해서는 관대한 그녀가 왜,

당연히 부족한 쇼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다그치는 걸까,

어차피 나오코는

앞과 뒤가 맞춰지는 여자는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당신의 답은 무슨 뜻이야.”


“자식을 두고 포기 란

단어는 맞지 않아,

쇼는 다른 아이들과 같아,

그렇게 키우면 돼

쇼가 그럴 땐,

내가 조금 힘들면 되니까.”


나오코는 발작, 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 두려워했다.


“나오코, 당신이 조금 힘들면 된다?

아… 쇼는 발작할 때마다 죽었다

깨어나는 기분 일 거야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힘들면 된다고?

아니 그 부분도 당신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거, 몰라?”


“당신, 말은 참… 절망적이야.”


웬일인지 나오코는 참착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현실이야, 나오코 쇼는 빠르게 자라고 있어."


“쇼는 그들처럼

늘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아

분명 나아질 수 있어.”


그녀가 뱉는 말들을 들어보면

정말 끔찍이도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난, 당신의 생각을 기다려 줄 수 있어,

하지만 쇼는 그렇지가 못해.”


“난 내 생각을 분명히 말했어,

계속 이 얘기를 해야만 하는 거야?”


그녀는 쇼의 발작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숨이 가빠지고 얼굴은 늙은 노모가 된다.


“나오코.”


그녀는 가운의 목 부분을 여미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겐토의 얼굴과 목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오코.”


그녀는 그만하면 됐어,라는

눈빛으로 간절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이 쇼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 나 또한 지켜볼 수 있어.”


독한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그는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켠 후,

탁자의 중앙 부분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겐토의 뺨을 쓸었다.

그때의 그녀의 얼굴은

미네코의 얼굴처럼

세상의 근심을 모두 떠안은

나이 든 노모처럼 보였다.


출처, 오버 더 펜스



“불쌍한 겐토.”


그녀의 손끝이 뺨을 훑는

야릇한 느낌에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오코가 속삭였다.


“하지만, 난 당신에게 미안하지 않아,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오코의 엉뚱한 대답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오코의 말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온몸을 찔린 것처럼 살이 아팠다.

겐토는 다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당신은 온전치 못한 내 마음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를 택했고

당신 맘속의 모든 것을 뱉어 버리면

그 순간, 모든 것들이 혹여 사라질까,

두려워 늘 전전긍긍… 이지.”


침묵을 지키던 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매운 고추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코끝도 붉어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쇼는 괜찮아.”


겐토는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위스키를

한 번에 털어 넣는다.


“하…”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발간 모습으로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나오코는 그의 양쪽 볼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다가온 그녀에게 겐토가 속삭인다.


“당신을 망치고 싶어.”


그녀는 그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할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을 이해해.”


덩치 큰 겐토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나오코는 더욱 세게

그를 끌어안았고

그는 다시 속삭였다.


“지독한 것.”


강하게 풍기는 머스크 향은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살을 찾을 수 있게 했다.

머스크 향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콧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떴을 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어디론 가 사라지고 난 후다.

시야가 흐려진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용서한다, 용서한다.

안 한다 용서 안 한다.

… 나는 아직 사랑한다.’


술에 취한 겐토는

짐승처럼 네 발로 기고 있었다.

흐린 시야로 발가벗은 살색의

먹잇감이 보였다.

다시 풍기기 시작한 머스크 향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먹잇감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새하얀 이불 위의 살색에

입이 먼저 닿았다.

힘을 주어 물어보려 하지만

그녀의 살색은

절대 물리지 않고 튕겨져 나간다.


“아앗.”


그녀의 신음에 하얀 이불과

그녀의 살색을 더욱 거세게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무릎으로 꾹,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놓는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약한 곳을

거세게 다루며 그녀의 비명 섞인

신음을 기다려 보았다.


“아아앗.”


겐토는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고개를 들어 악, 소리를 내며

다시 어깨를 들썩였다.

이죽거리는 얼굴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릴수록

그는 그녀를 세게 밀어 붙였다.

나오코는 그의 압박을 이겨내려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힘에 가느다란

그녀의 팔목은 쓸모가 없다.

포기한 것처럼 나오코의 인상을 쓰던

미간이 쭉 펴지더니,

평화를 찾은 것 마냥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동공이 확장되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그녀의 긴 목을 두 손으로

꽉 쥐곤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더욱 세게 힘이 들어간

엄지 손가락은 하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망가뜨릴 거야.’


나오코는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을 꽤 뚫고 있는 그녀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하더니

겐토의 힘 빠진 발간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살찐 그녀의 젖가슴 위로

그의 땀방울, 또는 눈물 방울이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겐토는 힘 없이 나동그라졌고,

거친 숨소리를 오랫동안 헐떡거렸다.


“으억.”


그는 마치 분이 풀리지 않은

사람처럼 하악거렸다.

어디선가 쇠의 역한 비린 냄새가 풍겨왔다.

가슴 부위 살갗이 기분 나쁘게 쓰라린다.

나오코의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상처 난 곳을 어둠 속에서 만지작거리니

쇠 냄새가 더욱 강하게 퍼졌다.

얼핏 본 손가락은 거뭇했고 미끄덩거린다.

그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벌러덩, 누웠다.

겐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더 지독한 걸 거야.”


그녀에게서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늘 하는 말이다.

오늘은 그녀의 귓속으로도

그 말을 전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그녀의 몸은 어둠 속에서도

마녀처럼 반짝거렸다.


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와 입김에 놀라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정을

깜박거리며 바라보다

아직 깊은 밤이란 사실에

실망하며 벌떡 일어난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그녀는

아직도 달빛에 반짝거린다.

그녀를 갖게 될수록,

밀려오는 허탈감과 공복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매번 밤을 누리지 못하고

일어나 또 다른 밤을 보내야만 했다.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공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입으로 집어넣어

욕구를 채우고야 말았다.

한참 동안 냉장고 문을 열고

눈알을 열심히 굴리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맘에 드는 크기와

혀의 쾌락을 느끼게 해 줄 것이 없어 보였다.

체념한 채 냉장고 문을 닫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닥만 내려보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좋은 성능을 갖고 있던 냉장고에서

한기가 불어 닥친다.

아직까지 어둠 속 찬 공기는 반갑지가 않다.


쇼의 것으로 보이는 우유를

얼른 집어 들고 빠르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의 입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으, 스스.”


몸의 떨림과 목마름은 늘 반대의 길이다.

채 뜯지 않은 우유를 뜯어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마셨다.

원형 탁자 위의 바싹, 마른 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마저 입 속으로 구겨 넣어 씹기 시작했다.

딱딱한 빵은 입 안의 침과

섞이기 시작하자 고무를 씹는 것처럼

질기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퉤엣.”


개수대에 씹다 만 빵이 척, 하고

찰 진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남은 우유를 넘기며

입 안의 빵을 모조리 헹구어 냈다.

겐토는 질긴 빵에 턱이 아팠는지

요리조리 움직여보다 딱, 따닥하는

소리에 욕이 터져 나왔다.


“아앗, 젠장 젠장, 망할.”


턱이 빠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아.”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우유가 담긴 종이팩을

개수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마치 그녀가 단잠에서 깨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꼭, 그는 자기 집이 아닌 양,

서성이다 나오코가 잠들어 있는

방 문을 닫았다.


“췌엣.”


겐토는 나오코가 잠들지 않다는 것에

온 믿음을 쏟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부정하고

싶은 쇳소리가 자꾸만 배어 나온다.


“젠장 젠장 젠장”


하릴없이 거실을 서성이다,

멈칫하며 쇼의 방 문틈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들어가려던 발은 멈칫하다

빛이 반짝거리는 베란다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의 귓속으로 꼭, 들어가길 바라는 것처럼

뒤꿈치를 꾹꾹, 누르듯 밟으며 걸었다.

그는 닫힌 문을 꼼꼼히 확인한다.

뭔가 은밀하게 꾸미는 사람치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게 들렸다.


사람의 손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것처럼

푸른색 타일 위는 먼지로 가득했다.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담배를 피우기 위한 핑계로 삼았던 이곳.


얼마나 쌓였던 먼지인지

발바닥에 얇은 천을 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먼지 쌓인 푸른색 타일은 미끄럽기까지 하다.

겐토는 난간을 잡고 밑을 내려 다 보았다.

어둠 속 미세하게 뿜어 나오는 달빛은

아무 그림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그 밑은

마치 자신과 그녀의 감정과 같아

안타까운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고개를 들어 보이지도 않은

검고 먼 곳을 응시했다.


자신이 있는 그곳과는 다르게

가지각색의 빛과 전선들이

인간관계처럼 꼬여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아주 불쾌하다.

이 도시는 흑백사진을 잘라서

붙여 놓은 것이 분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 까마귀가 깍,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어둠 속에서도 까마귀의 눈은

번뜩거리며 눈에 잘도 띈다.


겐토는 그 속에 섞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바로 앞을 날던 까마귀마저

그를 모른 척, 한다.

난간을 잡고 있는 두 손은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는 모습이다.

그의 상체는 거의 앞으로 숙여져 있었고

난간을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정말 공기와 함께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공포가 생길 때쯤,

빠르게 눈을 뜬다.


꽤 신선한 바람이

그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뚫고

난간에 밀착된 발바닥에

공기를 만드는 것 같았다.

겐토는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어

난간을 잡았다.


‘놔줘.’


다시 눈을 꼭 감았지만

붕 뜬 몸이 바람과 섞여 있는 것 같은

공포를, 결국 그는 이기지 못한다.

커다래진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뇌까지 공기가 들어가도록 길게 들이마신다.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몸이 비틀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 덕에

등이 욱신거렸고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진 채

붉은색이 터져 말라버린 상태다.

검은 죽음과 친해지려 할 그때,

고맙게도 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잊고 있었던 삶의 이유의 대한

존재의 목소리다.

그 소리는 뾰족한 창이

욱신거리는 등을 뚫고

가슴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아파 붉은색이 말라버린

입술을 앙 물었다.


그의 목 울대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윽, 으윽, 으어어어어.”


이윽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구의 몸이 바닥에 널 부러졌다.

아래층에서 베란다 문을 열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오코는 그때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자신의 모습을 비웃으며 말했다.


“넌 놓지 못해.”


달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지만

끝내 구름 뒤에 숨어 비웃기만 할 뿐이다.

겐토는 위를 올려다보며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


“으어억, 으하하하학학.”


그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게

쇼는 때마침 참던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 거구의 몸이

그리도 작아 보일 수가 없다.

쇼의 소리가 가까워진다.

내내 숨어있던 달이 아는 척이라도 하는 듯,

아이를 달래며 비춰준다.


쇼는 울음을 그치고

작은 코스모스로 베란다 문을 탁, 탁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얼굴에 묻힌 땀, 눈물, 의

액체가 범벅된 그의 얼굴은

막 울음을 그친 쇼의 얼굴과도 같다.

그제야 유리 안에 비친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고 먼지로 거뭇하게 변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 빠 아빠.”


그는 온 힘을 다해 쇼를 끌어안았다.

거뭇한 손을 옷에 쓱쓱 닦아내며

아이의 마른 눈물도 닦아 냈다.


“아빠.”


“으응, 쇼오.”


“졸.. 려요.”


“응, 그래.”


찬 바람이 아이를 훑고 지나갈까,

빈틈없이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쇼는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금세 가슴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마룻바닥에 남은 그의

검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나오코는 눈을 감고도

검은 발자국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겐토는 쇼를 그대로 안고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쇼오,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미안해,

너무 미안해.

미안해, 내 아가,

아빠가 미안해….


아주 잠깐 쇼의 갸르륵,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모든 것이 다시 평온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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