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잘 가
안녕, 내 사랑
집 안의 온갖 물건이
규칙 없이 놓여 있었다.
정리했던 기억이 희미하다면
오랫동안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규칙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발 디딜 틈도 좁아지고 있었다.
가끔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어쩌다 뾰족한 물건이라도 밟게 되면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욕이 시작된다.
한풀 꺾인 분노가 가라앉을 때쯤,
굉장히 수위 높은 자괴감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기 시작했다.
또 하나, 습관처럼 자주 가만히 앉아
생각을 멈추는 일도 잦아졌다.
타다요시가 곁에 없는 긴 시간 동안
미네코는 그의 물건을 옮기거나
잠자리의 동선을 바꾸거나
그가 피우던 담뱃대를 치우거나, 를
단 한 번도 실행해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이부자리엔
늘 그가 베던 베개가 놓여 있다.
누렇다 못해 얼룩얼룩 검은빛은
보기만 해도 더러워 인상을 찡그리게 된다.
미네코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타다요시의 베개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억울함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지거나,
욕이 섞인 말이 나올 것 같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려보낸 일도 오래,
이젠 그런 행동도 사라진 지 오래다.
미네코는 바닥에 주저앉았던
엉덩이를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앙다문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비장하다.
이번엔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타다요시의 방문을 사이에 두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모습 같았다.
문지방을 밟고 선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급하게 그의 방문을 쾅, 하고 밀어버렸다.
정리,라는 단어에
여전히 그의 방은 포함되지 않는다.
미네코의 머릿속엔 여전히
타다요시가 누런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길게 뱉은 한숨 속에
수십 년 쌓인 니코틴 냄새가 났다.
제일 먼저 그녀의 손안에 들어온
블랙 니카 병, 그것을 쌓아 놓을 곳이
부족해 개수대 옆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씩, 비닐에 담아 조심스럽게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작은 병의 무게가 어찌나 무겁던지
여러 번 같은 동선을 또 얼마나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네코가 숨을 헐떡거린다.
타다요시가 심어 놓은 녹나무 옆,
자리한 그것들은 또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버려질 그것을 그녀는
녹나무 옆자리로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도 또, 그렇게
녹나무 옆에 자리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미네코의 움직임은 헐떡거림과 반비례했다.
폐활량이 좋지 않던 그녀는
지치지 않으려 애썼고
오히려 몸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점점 시계를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하루 전 방문을 알린 마나츠가
신경이 쓰인다.
마나츠가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휘둥그레지며 걱정하는 눈빛은
보고 싶지 않아 서다.
주인을 닮아 색이 바랜 누런 커튼을,
하즈키가 그랬듯이
꾹꾹 밟아 탁탁 털어 널지만
노란 볕을 핑계 삼고 싶을 정도로
여전히 바랜 색은 누렇다.
미네코의 입이 실룩거린다.
만족하지 못할 때 꼭, 나오는 버릇이다.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많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이처럼 삐죽거렸다.
한숨을 돌리며 앉아 있는 미네코의
눈 밑은 어느 때보다 더 푹 꺼져 있다.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린 눈을 감았다.
보통 여자의 목소리보다 한 톤 더 높은
마나츠의 특이한 목소리가 들린다.
“미~ 네코오오!”
목소리에 반가움과 애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대며
눈을 감은 채 담배 연기만 늘어놓는다.
마나츠는 며칠 묵혀 있던
바싹 마른 빨랫감을 차곡차곡
쌓아 둔 것을 보고 쩝,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미네코가
한쪽 눈을 작게 뜨고 마나츠를 바라본다.
“미네코오 나왔어요.”
마나츠는 목소리를 더 올리며 말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다.
“정리 중이야.”
“흠, 내가 도울게요.”
마나츠는 미네코가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츠는 그럴 때마다
모른 척, 잘도 넘어간다.
“오늘은 밖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을 생각인데, 괜찮죠?”
마나츠는 정리된 옷들에 맞게
서랍을 열어 집어넣었다.
마나츠는 아직도 이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집에서 먹어.”
마나츠는 되묻지 않고
그녀를 보기만 했다.
그녀가 설득한다고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카레를 만들 생각이야.”
마나츠의 포기는 빨랐고
상냥함은 덤이다.
“와우, 그래요?
오랜만에 카레를 다 먹겠네.”
마나츠는 많던 옷가지들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이제 발에 닿거나 눈에 보이는
옷가지는 사라졌다.
미네코는 가래 섞인 기침을 연거푸 한다.
꼭, 타다요시의 기침처럼 거칠었다.
거친 기침은 미네코의 몸이
이기지 못하고 어깨는 들썩거렸다.
새빨개진 미네코의 얼굴을 보고
마나츠는 놀란 마음을
티 내지 않고 관찰 중이다.
미네코는 빠르게 자리를 피하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나츠는 산처럼 세모 모양을 한
재떨이를 원망하며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들어
비닐 속으로 털어 넣었다.
타다 남은 꽁초가 남긴
절은 내가 코를 찔렀다.
마나츠는 미네코의 기침이 잦아들 때쯤
조심스럽게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매력을
뿜어 대던 곧은 등이
굽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결혼 생활 내내 하루에도 몇 번,
미네코로 인한 짜증과 화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왜?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미네코가
안쓰럽고 걱정된다.
이럴 때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전화 한 통의 연락도 하지 않는
나오코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즈키에게 하는 행동은
세상에도 없는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
나오코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미네코는 주먹 두 개 만 한
감자를 깎으며 말했다.
“마나츠, 이제 그만 와.”
마나츠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또 그 얘기예요?”
“우리가 무슨 좋은 인연이라고,
너에게 좋을 게 없어.”
“에휴… 아 배고프다.”
늘 그러하듯, 그냥 넘겨보려는
마나츠를 흘기며 말했다.
“마나츠, 내 말…”
마나츠가 미네코의 말을
빠르게 잘라먹었다.
“근사한 곳에서 저녁식사 할 생각에
위를 텅텅 비워 놓았는데…”
미네코의 주름이 더욱 깊어진 모양새다.
더 이상 쭈글쭈글한 입술로
말할 생각이 없다.
말끔히 정리된 마룻바닥 어디를 디뎌도
어느 것 하나 발에 치이지 않는다.
미네코의 검게 그을린
유리 재떨이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미네코의 요리는 언제나 포만감에 의한
만족감을 오랫동안 남게 한다.
정갈하고 맛있기까지 한 요리는
입에 넣고 또 넣어도 모자랐다.
마나츠는 물때가 잔뜩 낀 개수대를
말끔하게 닦아 놓았고
그릇의 찌든 때도 말끔히 닦아냈다.
그 어떤 일을 했을 때보다
개운하고 만족스럽다.
이미 거실 바닥에는
블랙 니카와 땅콩, 과자가
쟁반 위에 올려져 있다.
마나츠가 정리하는 동안
미네코는 이미 술병에
손을 댄 모양이다.
새로 딴 병은 이미 투명하게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미네코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미네코가 원하지 않았던
세월이 남기고 있는 흔적들일 것이다.
미네코의 등 뒤로 부는
긴 바람은 마나츠의 한숨이다.
미네코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한숨이 늘어나면 늙고 있다는 거야.”
마나츠가 바닥에 앉아 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줘요.”
미네코가 들고 있는
블랙 니카 병은
마치 돌덩이를 들고 있는 것처럼
힘겨워 보인다.
갑자기 마나츠가 술병을
빼앗으며 낚아챘다.
“내가 해요.”
미네코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푹, 하고 밑으로 꺼져버렸다.
잔에 담긴 얼음이 알코올을 만나자
끈적할 것 같은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 낸다.
미네코가 주름지고 거친 입술로
술을 가져가니 틈이 벌어진
살점 사이를 파고들었다.
따끔했지만 통증의 쾌감은 배가 된다.
“아하… 츠읍.”
회색빛이 돌던 입술이
알코올에 젖어 분홍빛을 발한다.
회색빛과 분홍빛의 경계는
뚜렷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마나츠도 따라 입안을
술로 적셨다.
“하즈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술 한 잔에 미네코의 얼굴이 얼룩덜룩하다.
“할 말이 없어.”
“안부는 전해야죠.”
“네가 말해 줬겠지.”
“피이…”
마나츠는 가방 안에서
잿빛 수첩을 꺼내
유리잔 앞에 밀어 놓는다.
“이것.”
“뭐니?”
“미네코 거예요.”
미네코는 잿빛 물건을 들어
빳빳한 종이를 휘리릭, 넘겨본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종이 냄새가 싫지 않았다.
종이 끝부분의 긴 숫자는
그 물건이 통장임을
눈치챌 수 있게 했다.
미네코는 통장의 정체를
물어보지 않고 다다미 위에 내려놓았다.
아예 눈과 몸을
대각선으로 비틀어 앉았다.
그런 모습에 말을 이어가는 것보다
침묵이 낫다는 생각에
마나츠도 함께 블랙 니카만 홀짝거렸다.
미네코는 타다요시가 즐겨 듣던
노래를 틀었다.
노랫소리는 언제 들어도 구슬프다.
♬美空ひばり(미소라 히바리) - 悲しき口笛(슬픈 휘파람 소리)♬
블랙 니카의 황금빛은
어느새 반이 넘게 투명함이
차지하고 말았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슬픈 휘파람 소리를
마나츠는 잘도 따라 불렀다.
어깨와 허리가 활처럼 휘어
턱은 앞으로 쭉, 내밀고
머리는 밑으로 푹 꺼진 모양으로
앉아 있는 미네코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마나츠가 또 같은 말을 했다.
“미네코 거예요.”
미네코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는
고개만 돌려 마나츠를 내려 보았다.
“잘 알고 있지 않아?
난 그 애를 위해 한 것도 할 것도 없어.”
“미네코, 이건 보상의 의미가 아니에요,
그 사람은 미네코를 가족이라 부르니까…”
미네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를 괴롭힐 작정이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즈키는 다 알아요.”
“뭘?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것?”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미네코, 난 부탁을 받았고
돌려주는 건 미네코가 해요.”
마나츠는 뚜껑을 닫을 것 같았던
행동 대신 얼음이 녹아 없어진 잔에
다시 또 술을 따라낸다.
가족이라는 마나츠의 말에,
타다요시와 가정을 꾸리고 사는 내내
하즈키를 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역시 없었고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고 하즈키를 마치
원한 맺힌 사람처럼
밉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라는 말이 늘 떠올랐고
그 말처럼 정말 방법을 몰랐다.
때론 타다요시의 관심이
그에게만 기울일 땐
드라마에서 볼 법한
나쁜 새엄마가 되기도 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남 보다 더 못한 사이였다.
그런 그에게 이제 와서
굽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은 하즈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다.
그저 히다 하즈키, 히다라는 성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있었고
죽어서도 못된 계모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변함을 보여주며
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손때가 가득한
통장을 내밀었다.
꼭, 이렇게 말 없는 잔잔한 행동이
미네코를 더 나쁜 사람으로,
또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미네코는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야겠어.”
마나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넓은 마당의 늙은 녹나무가
자신을 봐 달라며 푸르렀다.
마나츠는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하즈키를 오랫동안 홀로 사랑했지만,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더 그에 대한 감정이 집착으로
부풀어 올랐던 게 사실이다.
동네에서 손꼽을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는 전직 군인
아버지 타다요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도
비좁지 않은 커다란 집,
그리고 푸르른 풀들과 나무,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이었을 것이다.
마나츠는 그때 늙은 녹나무를 보자마자
하즈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하즈키, 저 큰 나무 말이야,
마치 타다요시 같아.”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떡 하고
버티고 있던 녹나무는
정말 덩치 큰 타다요시 같았다.
그 위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았다.
하즈키가 어릴 적,
타다요시가 뚝딱, 하고 만들어 놓은
나무 의자의 색은 바랬지만
아직도 튼튼해 보였다.
나무 의자가 미네코가 왔다는 신호를
삐걱하며 소리를 지른다.
왜소한 미네코가 앉아도 작아 보였다.
맑게 갠 하늘 덕에 달빛, 별빛이
미네코를 환히 비춰준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받은 그녀는
늙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타다요시의 녹나무 옆이라 그런 모양이다.
녹나무 잎이 바람에 부딪는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미네코 나 결혼해요.”
눈을 감고 있던 미네코는 화들짝,
놀라 몸이 움찔한다.
“무슨?”
“놀랐죠?”
마나츠는 소리가 울리도록
목을 뒤로 젖히며 깔깔댔다.
“하하하하.”
뒤늦게 미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네코의 얼굴은 밝게 화색이 돌았다.
“너무 잘된 일이야 세상에, 마나츠
근래에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어,
너무 잘 됐구나.”
마나츠는 그녀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굴었다.
“그럼 도쿄로 가겠구나
너무 잘 된 거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마나츠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또다시 웃었다.
도무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웃는 마나츠의 모습에
의아했지만 그녀의 행복을 빌며
미네코도 함께 웃었다.
“아, 미네코 어쩌죠?
그 사람, 아니라, 구, 요.”
미네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나츠를 보았다.
죽기 전까지도 마나츠는
하즈키를 놓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마나츠의 옆자리는
하즈키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정말 하늘도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으응? 뭐라고?”
“아니라고요, 잘못짚었어요.”
“아니 무슨.”
“이츠키, 에요.”
미네코는 늙어버린 손바닥으로
상처 난 입술을 가리고
아주 잠시 시간이 멈췄다.
“이츠키의 이츠키?”
마나츠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마치 자기의 일이 아닌 것처럼
다시 웃음을 멈추지 않고 키득거렸다.
“아, 마나츠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마나츠가 단호하게
장난기 없이 대답했다.
“놀리는 것, 아 니 에 요.”
“설마, 마나츠가 그 머리칼이
조금 남은… 아, 말이 안 되는데...”
마나츠는 더 큰 소리로 키득거렸다.
“맞아요 대머리 아저씨.”
“그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이긴 하지,
인색해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거든,
아주 따뜻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어
마나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네가 결심했다는 건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마나츠는 웃음을 멈추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마나츠가 미네코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네코가 마나츠의 입술을
채근하며 담배를 획, 하고
뺏은 후, 자기의 입술로 넣었다.
“그렇다면, 이것부터 끊어.”
담배의 첫 모금을 쭈욱, 하고
빨아 넘기니 미네코의 볼살이
움푹 들어가 오랫동안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네코가 뱉는 연기가
녹나무 잎에 안개처럼 살포시 앉았다.
“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나…”
오랜만에 미네코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미네코의 웃음소리에
힘은 없지만 빈틈없이 흘러나왔다.
“아주 좋은 소식, 고맙구나.”
마나츠가 그녀의 좁은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
“고마워요, 미네코.”
수두룩하게 쌓인 병 뒤편에
하얀 플라스틱 바구니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나츠가 일어나 녹나무를 향해 걸었다.
바구니 안에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냈다.
“아… 이런.”
쌓여 있던 비닐을 벗길수록
마나츠의 눈이 반짝반짝거린다.
“이것, 멀쩡한데… 왜요?”
미네코에게 바구니가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을 흔들며 치우라고 손짓했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베일을 벗은 수십 개의 립스틱,
섀도, 향수, 상표를 떼지 않아
끈적끈적하게 녹은 흔적,
바구니 근처에 코만 들이대도
미네코에게 풍기던 냄새가 났다.
사라진 지 오래된 미네코의 냄새를 맡아보니,
그녀의 잿빛 입술과
니코틴에 찌든 냄새가 야속했다.
하지만 미네코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의 미네코, 새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동동,
멀찌감치 있을 때부터 풍겨오는 머스크향.
그때의 그녀가 그리울 때가 있다.
마나츠는 상표가 녹아 끈적거리는
립스틱을 들어 올리며
떼어 내도 되냐는 시늉을 한다.
미네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게 뻗은 발간 립스틱은
장미 향을 뿜었다.
의외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립스틱 뚜껑을 열어 확인한 립스틱을
하나씩, 하나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붉은 물감을 쏟아 놓을 것처럼 발갰다.
“다시 보니 지겨워.”
“미네코 답지 않아요.”
미네코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곤
마치 껌을 씹는 것처럼
송곳니로 꾹꾹, 씹어 대는 중이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채
납작하게 수명을 다한 모습이다.
마나츠도 그녀를 따라 기다란 담배에
립스틱을 묻혀가며
질겅거리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피우지 않은
꼭, 정상적인 사람처럼.
갈색 자주색 붉은색 노란색의 계절이
조금씩 발을 들이며 노크했다.
찬기 섞인 방을 허락해 줄 리 없는
마나츠는 취기에 열어 놓았던
창문을 조용히, 천천히 닫았다.
낡은 집은 삐걱, 하며
아침 인사를 티 나게 하는 중이다.
낡음은 소리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깨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주방 미닫이문을 밀어 제친다.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임은
느릿느릿, 냉장실을 뒤지느라
냉기가 바닥에 흘러내린다.
겨우 찾은 돼지고기를 냄비에
한 주먹 집어넣었다.
이번엔 고난도로 숙련된 칼질을 보일 참이다.
당근과 감자를 썰고 있는 속도는
빠르고 소리는 조용하다.
자글거리는 소리로 익고 있는
돼지고기에 그들을 투척했다.
마나츠는 잠들어있는 미네코를 떠올리며
자글거리는 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냄비에 물을 집어넣는 순간
자글거리는 소리의 절정을 이루다
쉽게 사그라든다.
된장을 개어 내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은색 뚜껑을 닫았다.
결혼 생활 내내 아침잠이 없는
미네코 덕분에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음식 준비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어떤 날은 부리나케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 반겨주는 이 없이
개수대 안의 쌓인 빈 그릇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하즈키에게 원망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 시절 늦잠은
정말 달콤했다.
길지 않은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미네코의 눈치로
아침 일찍 부지런 떠는 것이
어느새 몸에 배어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8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전날 밤 블랙 니카를 모두 비운
늙은 미네코의 숙취가 걱정이다.
녹차를 끓여 낸 물과
으깬 장아찌가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찌그러진 은색 뚜껑이 보로록,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된장이 풍기는 특유의 짠 내가
주방 안을 감싼다.
마나츠는 조금 더
미네코를 기다릴 수 없었는지
그녀의 방문을 기웃거리며
마룻바닥을 왔다 갔다
삐걱거리는 소리로 요란을 떨었다.
인기척 없는 방문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미네코의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무엇과의 치열한 싸움인지
알 순 없지만
까마귀가 지저귀는 소리가
경박스럽고 공포스럽게 들려왔다.
갑자기 불길함, 아찔한 생각에
순간 눈을 번쩍 뜨고 방문을
소란스럽게 열었다.
밀려 나간 미닫이문이
벽의 끝부분에 닿아 부딪힌다.
“챙.”
미네코는 타다요시의 베개를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그
녀의 허리는 굽었고 등은 작았다.
“미네코오.”
소리에 기척이 없을 리가 없었다.
미네코의 어깨를 흔들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미 - 네코오.”
그제야 미네코의 어깨가 움찔하며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긴장이 풀린
마나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 이야.”
미네코는 귀속에서 까만 귀마개를 꺼내며
푹 꺼진 눈으로 마나츠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나츠를 보더니
어리둥절하며 자기의 이마를
부여잡으며 숙취를 느낀다.
“마나츠?”
그녀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며 울 듯
미네코를 보며 말했다.
“배고파요.”
마나츠의 아찔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나츠의 등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나츠의 등줄기에 땀이 흘러
간지럼을 태우며 옷으로 스며든다.
요란한 색깔의 바람을 허락해 줄 요량,
닫아 놓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름의 끝을 잡은 나뭇잎이 날아들었다.
집 안의 된장국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마나츠의 광대가 쭈뼛, 하더니
이내 봉긋하게 솟아오르며
입꼬리도 함께 솟았다.
미네코의 모든 행동은 예전 같지 않다.
그녀를 미워하며 싸웠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얼토당토아니했다.
결혼의 끝은 물론 그들의 문제였지만,
미네코로 인해 하즈키의 심리를
힘들게 했던 때도 많았다.
물론 처음엔 그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녀의 탓, 그의 탓으로 돌렸지만
그건 답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얼마 안 되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이제 미네코는 연거푸 마신
금빛 액체에 의해 풀었던
이야기의 대가가 커진 나이이다.
무게도 나가지 않은 나무 숟가락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길게 뻗은 대 벌레처럼 보였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숟가락 위에 장아찌를 올려 주었다.
무심한 듯 행동했지만
훅, 내뱉는 콧바람이 인정스럽기만 하다.
“무리했어요.”
미네코는 침묵을 지키며
우적우적 씹기만 했고
된장국을 마시는 소리는
호흡이 짧아 뚝, 뚝 끊겼다.
기어코 사레들린 그녀는
기침을 꾸역꾸역 참아 내는 모습이다.
흰 눈동자는 벌겋게 핏줄이 섰다.
멋쩍음을 표현하려는 지 입을 열었다.
“타다요시와 함께
블랙 니카를 들이켤 땐,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세월을 부정하고, 떠나버린 그를
그녀는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나츠는 따뜻한 보리차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따뜻한 보리차는 몸살이 왔거나
체했을 때나 우울했을 때나
미네코가 내밀었던 명약이다.
자신이 하던 모습이 배어있는
마나츠를 보니
씁쓸함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고맙구나.”
마나츠는 식은 보리차를
다시 데우기 시작했다.
“마나츠 콜록, 콜록...
결혼 말이야.”
미네코의 궁금함을 단번에 대답한다.
“가족끼리 작게요,
그 사람도 그렇게 하길 원해요.”
“내가 꼭, 도울 일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마나츠의 미소가 활짝 열리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
“혹시 엄마 역할을 하겠다,
이런 말은 말아요.”
미네코도 따라 웃는다.
“만약, 그렇다며
그 사람 집에서 우릴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겠죠,
크큭큭.”
“아하하.”
미네코는 느릿느릿 일어나
식탁 위 마나츠의 손 등에
손을 올리고 툭툭 보듬는다.
“내가 알아, 마나츠 넌 행복할 거야.”
마나츠는 데운 보리차를
다시 미네코의 잔에 따라냈다.
“고마워, 난 좀 쉬어야겠어.”
“응, 그래요.”
보리차를 들고 다시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녀다.
“참, 갈 땐 문단속 좀 해 줘.”
미네코는 뒤를 돌아보기도 버거웠는지
등을 보이며 말했고
그 말뜻은 올 사람이 없다,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쓸쓸한 사실이다.
“네, 그럴게요.”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혼자 사는 여자답게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철커덕.”
마나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 자주 연락할게요.”
미네코와 함께 먹지 못한
근사한 저녁 외식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츠키의 성격을 보면
미네코에게 찾아오는 것을
반대하거나 다투거나,
따위의 일은 없겠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란
감정을 나누기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를 배려하고 싶다.
얼마 동안은 미네코 특유의 말투는
듣기 힘들 것 같다.
하즈키가 떠난 방,
그리고 자신이 떠났던 방.
푸른빛의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마나츠의 결혼 생활 중 가장 맘에 들었던,
사치스러웠던 침대,
그리고 이젠 텅 빈 책상,
여기저기 실이 뜯긴 다다미,
다시 이렇게 마주하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즈키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며
넓은 창문을 가리곤 했지만,
왼쪽이 둥근 하현달이 떠올랐을 땐 예외였다.
자정부터 시작된 반달 모양의
달을 보고 있으면 꼭,
반이 모자란 자신의 모습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새벽까지 그 모습을 보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속삭이다 지쳐 잠이 들었고
늦어 버린 아침 광경에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인 채
서로의 입가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던 그때,
찰나였지만 아름다웠다.
유리 속에 끼워 놓은 나오코의 그림 마저.
마나츠가 속삭였다.
“안녕, 내 사랑.”
마나츠는 녹나무 옆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비추는 태양에 갑자기 뜬 눈을
고정하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대문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처음 그와 헤어질 때,
이곳이 마지막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더 씩씩하고 힘이 실려 있다.
한참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이젠 됐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의 집은 삐뚤어져 있었다.
옆으로 걸음을 옮겨 보아도
반대로 걸음을 옮겨 보아도
처음 봤을 때 그때처럼
삐뚤어진 모양이다.
처음 그곳에 왔을 때
하즈키에게 말했다.
“자기, 집 말이야, 저기 좀 봐.”
마나츠가 왼쪽 지붕을 가리켰다.
“봐, 기울어 있어.”
하즈키도 알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삐뚤어진 거겠지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