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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그리고 새

27. 둥근 머리통

by 금봉



백합, 그리고 새




마호는 달라진 코하네의

머리 모양을 보고 하루 종일

눈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큰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리리카는 눈치도 없이

코하네의 머리통에 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떤 얘기도 늘어놓지 않은

코하네에게 뜬금없는

위로를 퍼붓는 중이다.

그런 게 아니라는 둥,

오해 말라는 둥,

하지만 코하네는 오해를

풀어내기도 귀찮은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리리카를 바라보다

마호를 보다 눈치를 살폈다.

마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2층 창문을 닫고,

키를 넣어 비틀어 잠그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리리카는 못된 남자를 빗대어

말하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내려가 정리 중인 것 안 보여?”


한참 후에 반응하는 리리카는

정말 놀랐을까, 싶을 정도로

여유 있는 목소리다.


“앗 깜짝이야, 소리는…”


리리카는 입을 삐죽이며

쾅쾅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내려갔는지 확인하던

코하네는 일어나 마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호.”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호 안쪽 정리는 다 했어.”


코하네의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할 말을 꿀꺽, 삼키며

불쑥 튀어나올 뻔한

화가 쑥, 들어가 버렸다.


“먼저 내려가 있을게.”


“그래.”


마호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럽고 온화하다.

코하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리리카와 히로시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곧 내려올 거야.”


히로시는 아예 밖으로 나가 앉더니

담뱃불을 붙였다.

리리카는 다시 코하네의

머리 모양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뒤통수가 정말 작아.”


졌다는 듯, 코하네는

웃음으로 대답한다.


“바람도 차가워졌는데 말이야,

쯧 머리카락은 단백질 덩어리래.”


코하네가 말했다.


“아, 리리! 알았어 그만 응?”


“알았어 알았다고,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야.”


코하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리카는 다시 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참, 내일은 예약이 꽉 차 있던데,

알고 있지?
네 머리통을 보면 다들

놀라 자빠질 거야 흠, 걱정이군.”


마호의 발소리가 쿵쿵.

마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리, 정말 걱정되면

내일 코하네 몫까지 해 어때?
정말 걱정이 되는 거야? 뭐야?”


리리카가 발끈하며

마호를 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걱정되니까…”


오늘 마무리도 코하네 몫이란 것을

말하고 싶지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마호가 다시 리리카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러니까, 낼 코하네 몫까지? 응?”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의 리리카를

코하네가 팔을 끌어당기며 다독였다.


“리, 그럴 리 없어 자 나가자.”


리리카의 애써 더 할 말을

참고 있는 입술이

툭 불거져 나왔다.

마호는 문단속을 끝내자마자

뇌에 박힌 습관적인

예의가 튀어나온다.


“자, 다들 수고했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리리카만 입을 뻥긋,

하지도 않는다.

히로시가 말했다.


“저 먼저 가겠습니다,

내일 봐요.”


히로시는 늘 씩씩했고

모든 일에 관심이 없다.

리리카와는 정말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여성스러움이 과해

인상이 찌푸려질 때가 많은

리리카에 비하면

히로시는 언제나 담백한 말투와

중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다.

리리카도 따라 말했다.


“내일 봐.”


리리카가 빠르게 히로시를 뒤따라 걸었다.

리리카가 히로시를 부르며

멈추길 바랐지만 징징대는

리리카의 말을 듣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 코하네가 문두스에 왔을 때,

리리카는 모든 점에서

코하네를 질투했다.

심지어 주인장에게

손님들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는 늘 무뚝뚝하다며

잔을 자주 깨거나

지각을 일삼는다는 둥,

모든 얘기를 반대로 늘어놓았다.


물론 주인장은 마호를 더 믿었지만,

코하네를 보는 주인장의 눈빛은

그리 좋진 않았다.

마호는 그 소리를 듣고

리리카에게 그만두라는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한데 마호를 말렸던 건 코하네였고,

이후로 오히려 코하네는

리리카의 할 일을 대신한다거나

자신의 휴일마저

그녀에게 양보했던 날들이 다반사였다.

당연히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안 그래도 마호에게

눈엣가시로 박힌 리리카가

코하네를 놀리듯,

말하는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리리카에게 거칠게 표현하는 마호를,

코하네는 자신과 리리카를

차별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코하네의 인간관계는

늘 그렇게 선명했고 순수하다.

코하네는 어깨에 걸친

흰 카디건을 주섬주섬 입었다.

마호는 코하네게만

보이는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크게 내뱉고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마호가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잡았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쏙, 자신의 손 안으로 깊이 감쌌다.


“마호, 한잔하고 갈까?”


마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누가 먼저일 것 없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었다.

금요일의 열기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얼마나 가득한지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를

눈을 감고 듣고 있자면

정말이지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웅성웅성, 이란 글자가

떠오르게 한다.

북적거리는 날은 주인장도

아무리 단골손님이라도

맞이해 주기가 어렵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주먹 하나 들어갈 틈새도

보이지 않게 두 자리가 남아 있었다.

꾸역꾸역 엉덩이를

밀어 넣어 봤지만 역부족이다.


마호는 갑자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의자 앉혔다.

담배 연기 탓인지

그 어느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호도 어렵게 자리에 앉긴 했지만

영 불편한 몸짓을 하며

아예 서서 코하네 옆에 자리한다.

거추장스럽기만 한 의자는

벌써 멀리 보낸 후다.


코하네의 얼굴은 술을

입에 대기도 전에 발개졌고,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마호의 심장은 유난히 두근거렸다.


“고마워 마호.”


나비넥타이를 한 새로운 바텐더는

굉장히 나이가 들어 보였다.

좁은 어깨와 마른 몸을 가졌지만,

볼록 나온 배는 입고 있는

조끼의 단추가 비틀어지게 했다.

흰색의 머리칼과 검은색의 머리칼은

5:5 정도로 적당한 비율을 하고 있었고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칼을

질끈 묶고 있었다.

덕분에 단정함은 배가 되어 보였다.

길게 뻗친 꼬랑지를 보니

코하네의 머리통이 쓸쓸해 보인다.

나비넥타이가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마호가 말했다.


“난 위스키 한 잔 주세요.”


코하네가 따라 말했다.


“전 진 토닉 주세요.”


“코하네 배고프지?”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가 잔에 얼음을 넣다가

마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다.


“미안해요, 얼음은 빼 주세요.”


“미안하긴요, 자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바텐더가 코하네를 흘긋거렸다.


“우리 작은 아가씨는

토닉을 얼마나 넣을까요?”


코하네의 기다란 눈이 웃었다.


“아저씨의 희고 검은 머리카락

비율처럼요.”


바텐더는 잠시 자신의 머리칼을 생각하는 듯,

멈칫하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적당히!”


“넷, 큿.”


새로 온 중년의 바텐더는

코하네의 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가 내민 진 토닉에 들어간 레몬은

마호의 미간처럼 반으로 주름져 있었다.

진 토닉, 첫맛의 신맛과 쓴맛은

코하네의 눈을 찡긋하게 만든다.


“음, 맛있어요.”


웃음으로 답하는 바텐더는

순식간에 맨 끝자리의

손님 곁으로 가더니

같은 친절함으로 주문을 받는다.

마호는 얼음 없는 쓴 위스키를

세 잔 째 들이켜고 있었다.

끊겠다던 담배는

벌써 반 이상이 타들어 갔다.

코하네는 담배 냄새가 싫지 않은지

그가 담배를 꿀꺽할 때마다

그녀도 꿀꺽하며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마호는 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코하네에.”


코하네의 기다란 눈이 둥그레졌다.


“으응?”


“내가 묻기 전에 먼저 말해 주지 그래?”


“으응?”


마호가 따라 말한다.


“응?”


그녀가 머리통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응.”


“흐음…”


“말, 하기 싫구나?”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정말...

별 이유가 없어서 그래.”


마호가 코하네가 앉은 의자를 비틀더니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코하네의 무릎이

마호의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한다.


“일어나 보니 머리칼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쳇.”


“쳇? 뭐야 설마 리리카 말처럼

남자 때문에?
또는 음, 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마호는 그녀의 눈을 흘기며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럴 리 없잖아.”


“푸핫, 히힛.”


“근데, 춥잖아.”


“으흐흐흣, 마호오… 난 괜찮아.”


코하네는 웃었지만 쓸쓸해 보였다.


“마호, 넌 꼭 카세트의 pause 상태 같아

자… 봐봐 내가 play를 눌러 줄게.”


코하네는 생뚱맞은 소리를 하더니

마호의 주름진 미간을 길게 꾹, 누른다.


“자 이젠 정지된 거기 좀

풀어봐 응?”


마호는 깃털 같은 코하네가

다치지 않게 옆으로 끌어안으며

뒤통수를 쓸었다.

뒤통수가 까끌거렸고,

흉강에 아릿한 통증이

목까지 올라왔고

끝내 코끝이 발개진다.


중년의 바텐더가 막 따라 담은

진 토닉 한 잔을 내밀었다.

꼭 맑은 유리알에

기름이 번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 이건 작은 아가씨께 드리는 선물.”


코하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이다.


“우와 고마워요.”


바텐더는 오른쪽 눈을 두 번 찡긋하며

말할 새도 없이 다시 사라졌다.

취기가 진해질수록 코하네의 입은

가벼워졌고 마호의 입은

점점 무거워진다.

코하네 답지 않게 내내 종알종알.

마호는 코하네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호가 마시는 위스키 한 잔당

담배의 양은 배가 된다.


“위스키 한 잔 더 부탁해요.”


어디선가 빠르게 다가온 바텐더는

마호의 얼큰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얼음을 넣어서 드시는 건 어떨까요?”


“네 고맙습니다.”


얼음 세 덩어리가 잔에 달그락 안착하자,

위스키의 양이 배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취기가 늘어날수록

담배 연기는 차츰 줄어들었고

그제야 주인장은 그들을 보고 알은체다.

코하네의 머리통을 보고

놀란 모습을 하더니 마호의 어깨를 툭, 건드린다.


“왔어?”


“이제 가야죠.”


주인장은 재치 있는

마호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늘 오늘만 같으면 좋겠어,

근데 코하네! 와 멋진데?”


유일하게 왜,라는 말을 붙이지 않은 인사였다.

코하네는 아예 이를 훤히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자, 적당히들 마시고! 응?”


발개진 얼굴과 동공이 풀린 마호의

눈을 걱정하는지,

머리통이 썰렁한 이유가 걱정인지

주인장의 말투는 굉장히 단호했다.

주인은 중년의 바텐더를 불러

마호의 잔을 가리키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고마워요.”


“그게 마지막 잔이다!”


바텐더와 같이 주인장의 목소리가

머무는 중에 휙, 하고 사라졌다.

다시 새 얼음이 채워졌고,

위스키의 양도 많아졌다.


“여긴, 꼭 술을 마신 사람만

정신이 온전한 것처럼 보여.”


“흣, 그렇지.”


“참, 마호, 쇼란 아이를 사귀었어.”


“응? 쇼?”


“으응, 큭.”


“누구?”


“나오코 아들.”


“아, 아들이 있었지.”


“나오코 집은 가까워,
얼떨결에 낮술을 먹고

그 집을 쳐들어갔지,
그때 나오코의 남편 얼굴을

너도 봤어야 해
그렇지 않아도 놀란 얼굴이

내 머리통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 크크큭.”


“우웃.”


“근데 그 모습도 잠시,

쇼가 눈에 들어온 순간,
온통 빛이 나는 것처럼 반짝거렸어
날 보고 배시시 웃는 모습은

정말이지, 천사야.”


“오, 드디어 맘에 드는 친구를

찾았구나? 응?”


코하네의 얼굴도 환하게 반짝거린다.


“아주 빛나는 갈색 눈의 천사.”


마호는 천사라는 말에

코하네의 어깻죽지를 돌아보며

날개가 숨어 있겠지,라고

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네가 빠진 천사 얼굴, 궁금해.”


“나오코가 부러워.”


“부럽긴, 너도 될 수 있어.”


코하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망에 부푼 얼굴을 하고

마호를 올려 보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호의 말을 들은 코하네의 머릿속이

무슨 상상을 풀어내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 상상 안에 자신의 모습도 있을까,

꺼내 볼 수 있다면 꼭,

확인하고 싶었다


참으려던 마지막 담배를 꾹꾹,

씹다 말고 끝내 불붙은

성냥을 들어 올린다.

들이마신 숨이 아랫배 끝까지

내려갈 것처럼 깊게 빨아들이며 내뱉는다.


“흐으읍, 퐈하아… 코하네.”


그의 입에서 안개가 불을 뿜는다.


“응.”


“이제 메어있지 않아도 돼.”


두어 시간이 넘도록

어렵게 골라 본 언어였다.

되도록 또다시 코하네의 머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리리카는 문두스 주인에게

코하네를 보자마자

연락을 한 게 분명하다.

하루 종일 리리카에게

독한 말을 내뱉으려 했던 것도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다.

리리카는 같은 직원들도 손님들도,

모두 코하네게만 쏟는 관심을

질투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했다.


늘 겉과 속이 다르게 코하네를 대했고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리리카는 근본적으로

못 땐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유독 마호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한 그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살이 훤히 보이는 머리통을 들이밀고

손님들을 맞는다는 건,

그가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옳지 않은 방법으로

그녀를 몰아내야 하는 것에 화가 났다.


마호는 주인에게 손님과 코하네를

눈으로 확인한 후

결정해 달라며 부탁했지만,

주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 그녀를 직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

오늘부로 정리를 부탁한다고

말로 매듭이 지어졌다.

갑자기 사라진 머리카락으로

정당하게 일을 마무리 짓기는

무리라는 건 당연하다.

손님이 오가는 곳에서

그녀의 머리통은 말이 안 되는

모양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제 모든 것은 마호에게 달려 있다.

물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도

그 앞에서 서운하다거나,

화를 내거나, 할 사람이 아닌 건 잘 알지만,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 어떤 무엇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다치는 게 싫었다.

코하네는 그가 쓰는 단어에

호감이 갔지만 실망도 빠르게

전해지는 순간이다.

마호가 말했다.


“무두스가 좋은 곳은 아니야

나쁘지도 않지만…”


코하네는 들이켜던 진 토닉을

입에 물고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읍, 으응?”


“좋은 곳이 아니야.”


마호는 계속 억지를 쓰고 있다.

그리고 코하네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아아… "


“그래, 자유야.”


코하네는 목소리를

나오코처럼 앙칼지게 큰 소리를 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얼굴 없는 사람에게 잘린 거야?”


웅성거림이 사라진 곳에서

그녀의 큰 목소리는

시선을 집중시켰다.

마호가 그녀의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서운해?”


“아니, 좀 갑작스럽긴 하지,

한데 억울하진 않지만,

배신감은 있어 흣.”


코하네 또한 리리카의 짓임을 직감하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치한 리리카”


“다신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되니까,

잘 된 거야, 코하네.


코하네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눈을 찡긋하며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머리 탓이구나?”


마호는 아무 대답 없이

위스키를 홀짝이지만

녹지 않은 얼음 탓에

혀끝만 살짝 축인다.


“미안, 마호.”


마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하네의 눈을 흘긴다.


“뭐어? 아니야 무슨.”


“오늘도 쭉, 신경 쓰이게 하고 있었어,

바보같이…”


“바, 보.”


“맞아, 바보.”


코하네가 의자 위로 다리를

끌어안더니 무릎에 턱을 괴고 말한다.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네.”


마호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빈정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쯧, 바보.”


“칫, 하아아…”


마호가 바텐더에게 손짓하며

그녀의 잔을 가리켰다.


“이제 실업자가 됐으니까,
오늘은 내가 사

제정신이 들 때까지 마셔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마호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왜? 마호?”


“아, 눈물이 날 지경이야 크크큭.”


“으으응?”


그는 아예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코하네
내일은 단체 손님이 예약한 날이야,
유치한 리리카는

머리가 참 좋지 않아
코하네 말 대로 안 됐네 큿.”


“아…”


“분명 네 손에 기대서

일할 게 뻔한데 말이야,
아주 잘됐네, 하하하하.”


“끝날 때까지 날 미워하겠네.”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렸지,
사장한테 말할까 싶어,

더 이상 직원은 필요 없다고.”


“마호, 짓궂어.”


그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멈추지 않고 계속 웃어 댔다.


“아하하하.”


코하네는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길게 밑으로 늘어놓지만

딱딱한 바닥은 멀게만 느껴진다.

언제쯤, 바닥에 발바닥이 닿을까? 란

찰나의 어느 순간엔

공포스러울 때도 있다.

상상하지 못한 높이면

어쩌지라며 공포스러운 생각은

늘 머릿속에 돌아다녔다.

뭐든지 알고 있는 덩치 큰 마호가

빠르게 한쪽 팔을 빌려준다.


“읏차, 잠시 다녀올게.”


마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까지 고인 채 계속 웃었다.

코하네의 흰색 원피스가 구깃거렸다.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지만

들어가자마자 알은체하는

커다란 거울은

그녀를 늘 놀라게 했다.

오늘도 역시 걸려들고 말았다.


“으엇”


코하네는 잠시 멈춰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살갗은 얇고 없는 살 덕에 나온 광대,

길게 꼬리를 내리며 뻗은 눈,

나무처럼 뻣뻣한 굴곡 없는 선,

등과 맞닿아 있는 가슴.

여자가 가진 매력이라는 단어를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조건이다.

가슴 위 앙상한 뼈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카디건 속에 숨어 있는

앙상한 팔뚝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



“휴우.”


차가운 변기에 엉덩이를 내려놓자마자

익숙해질 법한 차가움에

벌떡 일어설 뻔, 신음을 뱉는다.


“앗, 흐으.”


화장실 입구는 남녀가 함께 드나드는 구조로,

안쪽으로 들어서면 남녀가 갈라진다.

그 시절 흔하지 않은,

꽤 정성을 들인 화장실이다.

공용으로 쓰는 화장실이

대부분이었던 때,

이곳은 낡았지만, 꽤 매력적인 곳이다.

갈라진 타일 틈으로

마치 소리가 배어 나오는 것처럼

맞은편 목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남자 화장실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리가 자꾸만

코하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비누는

거품이 만들어질 리 없었고

그녀의 포기도 빠르다.

손을 닦고 다시 또 큰 거울에

자신이 노출되는 순간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에 어김없이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앗, 이런 멍청이.”


젖은 손가락을 위로하고

\어깨로 문을 힘겹게 밀었다.

그때 들어선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코하네의 어깨가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씻은 손가락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코하네는 숙련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몇 번의 굽신거림으로

미안함을 토로했다.

그때까지도 코하네의 손은

팔을 굽힌 채 올라가 있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보지 못한 얼굴도 따라 말했다.


“앗, 실례합니다.”


출처, 이별, 그 뒤에도


순식간에 스친 상황에서

목소리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멈칫하던 남자는 한쪽으로 몸을 비켜서며

여전히 손을 허공에 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은 그들을 붙잡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이한 것이라도 본 듯,

두 사람은 똑같이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허공에 머물렀던 코하네의 손가락이

원피스 자락을 꾹, 감싸 쥐었다.


코하네는 갑자기 귀가

꽉 막힌 느낌이 들었고

동반한 현기증은 남자를

빙글빙글 돌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쇼의 눈,

빛나는 갈색 눈을 뜨고 있는 그를

또 마주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갈색 눈은 짙은 커피 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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