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면 감천이다 — 위로가 심판이 되는 말

by 욕가이버

"지성이면 감천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누가 이 말을 하는지 한 번만 떠올려 보자.


시험에 떨어진 아이에게 부모가 한다. 사업이 안 되는 사람에게 선배가 한다. 5년째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생에게 누나가 한다. 실직한 친구에게 지인이 한다.


전부 안 된 사람에게 된 사람이, 혹은 적어도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한다. 반대로 간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성공한 사람에게 실패한 사람이 "지성이면 감천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없다.


이 말은 위에서 아래로, 안정된 쪽에서 흔들리는 쪽으로만 흐른다. 위로처럼 들리지만, 이 말이 실제로 하는 일은 다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지성이면 감천이야"를 들으면, 안 된 이유가 간단해진다. 정성이 부족해서다. 더 간절했어야 했는데, 덜 간절했다. 더 매달렸어야 했는데, 놓아버렸다. 안 된 이유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계속 매달린다. 안 되는 이유가 내 정성 부족이니까, 정성을 더 붓는다. 시간을 더 붓고, 돈을 더 붓고, 몸을 더 붓는다. 그래도 안 되면 "내가 아직 덜 간절한가 보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효과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저항을 만들지 않는다. 구조를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다. 제도를, 운을, 타이밍을, 자기 선택의 방향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화살이 자기 내면으로만 향한다. 정성의 부족. 마음의 부족. 간절함의 부족.


그리고 그 사이에 세월이 간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정말 지성이면 감천인가.


지성을 바쳐도 안 되는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평생 기도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다. 10년 공부해도 붙지 않는 시험이 있다. 20년 매달려도 실패하는 사업이 있다. 지성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다. 세상에는 정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구조가 문제인 것, 타이밍이 맞지 않은 것, 애초에 방향이 틀린 것. 이런 것들은 정성을 아무리 부어도 안 된다.


가까운 예를 하나 보자.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한다. 매년 수십만 명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대기업과 공기업이 만드는 양질의 일자리는 그 몇 분의 일이다. 100명이 10개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 90명은 반드시 떨어진다. 이건 정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산술이다. 나머지 90명이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자기소개서를 스무 번 고쳐 쓰고, 면접 준비에 몇 달을 더 써도 — 자리가 90개 더 생기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90명에게 사회가 뭐라고 하는가. "눈을 낮춰라." "중소기업이라도 가라." "노력이 부족한 거 아니냐." "요즘 애들은 편한 것만 찾는다." 자리의 절대수가 부족하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의 정성을 묻는다.


"중소기업이라도 가라"는 말도 다시 봐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집을 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노후를 준비하려면 일정 수준의 소득이 필요하다. 그 소득은 대기업·공기업·전문직 정도에서나 가능하다. 중소기업 평균 임금으로는 그 삶이 어렵다. 이건 청년들이 몰라서 안 가는 게 아니라, 알기 때문에 못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논의되지 않는다. 대신 "일단 어디든 가서 경력을 쌓아라"는 말이 내려온다. 그 경력으로 5년 뒤에 정말 대기업으로 갈 수 있는가. 통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은 극소수다. 그 사이에 결혼 시기가 가고, 주거 시기가 가고, 출산 시기가 간다.


결국 이 모든 대화는 한 방향으로 흐른다. 구조를 묻지 마라, 너의 정성을 물어라. 자리가 부족한 것은 논의하지 마라, 네가 덜 노력한 것을 반성해라. 이것이 "지성이면 감천"이 지금 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지성이면 감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구조적 현실을 볼 수 없게 된다. 안 되면 정성 부족이다. 더 이상 이유는 없다. 구조 탓을 하면 "남 탓한다"고 하고, 타이밍 탓을 하면 "핑계 댄다"고 하고, 방향이 틀렸다고 하면 "끈기가 없다"고 한다.


저항할 언어 자체가 사라진다. 모든 실패가 개인의 정성 부족으로 환원되는 세상. 그게 지성이면 감천이 만드는 세상이다.


이 말이 이렇게 쓰이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말이 옳다면 — 즉 "정성만 있으면 뭐든 된다"가 진실이라면 — 세상의 모든 실패는 개인 책임이다. 사회는 책임이 없다. 제도는 책임이 없다. 먼저 올라간 사람은 책임이 없다. 올라간 사람은 정성을 다했고, 못 올라간 사람은 정성이 부족했다. 그뿐이다.


이게 누구에게 유리한가. 이미 올라간 사람이다. 기준을 만든 사람이다. 구조에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정성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고, 그러면서 실패한 사람들에게 "너도 정성을 다하라"고 말할 수 있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가르칠 수 있다.


"지성이면 감천"은 성공한 쪽의 윤리다. 그리고 성공한 쪽이 실패한 쪽을 향해 던지는 말이다. 위로로 들리지만, 그 위로의 값은 실패한 사람이 혼자 치른다.


그런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다르다.


지성(至誠)의 至는 이르다, 誠은 정성. 정성이 끝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차이는 그 다음이다.


감천(感天). 하늘이 감동한다고들 번역하지만, 이건 감정이 아니다. 感은 응답이다. 天은 나보다 큰 흐름이다.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것. 시대, 구조, 타이밍, 운. 그것이 하늘이다.


정성이 끝까지 이르면 하늘과 맞닿는다. 하늘이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하늘이 지나갈 때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오래 서 있어야 하고, 오래 서 있는 법이 지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 하늘이 지나가지 않으면 정성도 소용이 없다. 내가 오래 서 있어도 하늘이 안 지나가면 끝이다. 그게 현실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은 "노력하면 된다"가 아니라 "노력만으로는 안 되지만, 노력 없이는 하늘이 와도 못 잡는다"에 가깝다.


즉, 이 말은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겸손의 언어였다. 하늘은 내가 움직일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라는 인정. 그런데 이 말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사이에, 겸손의 언어가 독촉의 언어로 바뀌었다.


다음에 누군가 당신에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말하거든, 한 번만 생각해 보라.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위인가, 옆인가.


당신에게 이 말이 필요한 상황인가, 아니면 이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상황인가. 이 말을 듣고 당신이 더 매달리게 되면, 편해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성이면 감천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이 말이 쓰이는 방식이 원래 뜻에서 멀어졌을 뿐이다. 원래는 끝까지 가는 사람의 자기 다짐이었다. 지금은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을 향한 심판이 되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놓지 말자, 하늘이 올 때까지." 그런데 남에게 하는 말로는 바뀌었다. "네가 부족해서 안 된 거야." 같은 말인데, 주어가 바뀌면 뜻이 뒤집힌다.


끝으로 한 가지.

지성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건 당신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늘이 당신 자리로 지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하늘이 지나가는 자리는 누구도 예약할 수 없다.


그걸 인정하는 것도 지성이다. 아니, 어쩌면 그게 진짜 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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