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양보, 배려 — 이름이 다른 세 개의 강요

by 욕가이버

"괜찮으면."

이 네 글자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상사가 말한다. "괜찮으면 이거 좀 봐줄 수 있어?" 다른 부서 팀장이 슬쩍 다가온다. "괜찮으면 이 자료 좀 정리해줄 수 있을까?"


괜찮으면. 괜찮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는가.


없다. 그러면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지시였다. 그런데 지시라고 하지 않는다. "괜찮으면"이라고 말한다.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선택권을 없애는 말. 이것이 가장 교묘한 부탁의 형태다.


우리가 매일 쓰는 말 중에, 이름과 실체가 다른 단어들이 있다. 부탁, 양보, 배려. 셋 다 좋은 말이다. 셋 다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한 번만 들여다보자.


부탁(付託). 付는 전하다, 託은 맡기다. 원래는 상대의 호의에 기대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에게 맡긴다. 해줄 수도 있고, 안 해줄 수도 있다. 거절이 가능해야 부탁이다.


다른 부서 상사가 "부탁인데..." 하면서 일을 건넨다. 내 직속 상사도 아니다. 지시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시라고 하지 않는다. 부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이 내 상사한테 한마디 하면 끝이다. 거절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그건 부탁이 아니다. 갑질이다. 그런데 갑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탁이라고 부른다.


양보(讓步). 讓은 사양하다, 步는 걸음. 내가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다. 원래는 오가는 것이었다. 내가 한 치 양보하면 상대도 한 자 양보한다. 양보가 오가야 예(禮)가 된다고 했다.


"양보해야 한다." 익숙한 문장이다. 그런데 양보라는 단어와 "해야 한다"는 같이 쓸 수 없다. 해야 한다가 붙는 순간 그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다. 의무다. 그런데 의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양보라고 부른다.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눈치를 받는다. 나쁜 사람이 된다. 양보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거절의 비용이 너무 크다. 그러면 그건 양보가 아니다. 강요다. 그런데 강요라고 부르지 않는다. 양보라고 부른다.


배려는 원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配는 나누다, 慮는 생각. 상대의 걱정에 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쌍방이다.


"서로 배려합시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있는가. 회의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보고서 톤을 맞추고, 타이밍을 재고, 표정을 읽는다. 반대쪽은 어떤가. 그런 적 있는가.


한쪽만 마음을 쓰고 있다면 그건 나누는 게 아니다.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복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배려라고 부른다.


부탁은 갑질이 되었고, 양보는 강요가 되었고, 배려는 복종이 되었다. 셋 다 이름은 그대로인데 실체가 바뀌었다. 이름이 예쁘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예전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주는 게 당연하고, 양보하는 게 미덕이고, 배려하는 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뀐 건 직접 당해서가 아니었다. 남한테 하는 걸 봤다.


같은 사람이 다른 동료에게 "괜찮으면..." 하는 걸 봤다. 급한 일이 아니었다. 동료가 바쁘다고 하자 표정이 변했다. 그 뒤로 그 동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돌았다.


그걸 몇 번 보고 나니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끝났다.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시간을 가져가고, 거절당하면 관계를 무기로 쓰는 사람. 그 사람이 나한테 "괜찮으면..."이라고 말하면, 나는 괜찮지 않다.


변한 건 내가 냉정해진 게 아니다. 이름 뒤에 숨은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다음에 당신도 비슷한 부탁을 해 봐라. 같은 크기의 부탁을, 같은 톤으로. 두 가지 중 하나가 벌어진다.


흔쾌히 들어준다면, 그 사람의 부탁은 진짜 부탁이었다. 빚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표정이 달라진다면, 그 사람의 부탁은 처음부터 부탁이 아니었다. 이름만 부탁이었을 뿐, 실체는 처음부터 다른 것이었다.


양보도, 배려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물러선 만큼 상대도 물러서는가. 당신이 마음을 쓴 만큼 상대도 마음을 쓰는가. 오가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거짓이다.


다음에 누군가 당신에게 "괜찮으면..."이라고 말하거든, 한 번만 생각해 봐라.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면, 그건 부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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