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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17. 2024

진실에 대한 고찰

 진실은 실존할까? 미디어가 뱉어내는 사회의 이모저모를 살피다보면 가끔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진실이라는 허구의 단면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의문이 든다. 그렇지만, 진실을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으로 상정한다면 어떨까?       어두운 방안에 사람얼굴이 있고, 그 얼굴을 향해 여러방향으로 조명을 비춘다고 상상해보자. 조명의 위치에 따라 얼굴은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왼쪽에서 조명을 비춘다면 얼굴의 오른쪽은 어둠속에 감춰지고, 오른쪽에서 조명을 비춘다면 왼쪽이 보이지 않는 식이다. 이렇듯 진실은 객관적인 실체로써 존재하나, 우리는 진실에 비치는 단면만을 바라볼 수밖에없는 더 낮은 차원의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마치 2차원 종이에 찍힌 점은 3차원의 물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3차원존재가 종이를 통과할때, 그 단면만을 목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유명한 맹인의 비유와도 맞닿아있다. 맹인에게 코끼리를 소개하는 비유를 아는가? 한 맹인은 코끼리의 다리만을 만지고, 또 한 맹인은 귀를, 다른 맹인은 코를 만진다면 각 맹인이 생각하는 코끼리의 모양은 매우 다를 것이다. 즉 시각의 존재없이는 코끼리의 진짜 모습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미디어가 비추는 진실만을 바라보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태원 참사를 생각해보자.  이태원참사에 대해 어떤 뉴스는 이렇게, 다른 뉴스는 저렇게 말하겠지만, 이 참사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그 현장에서 살아나온 사람도 그 현장의 총체적 실제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제로 당국의 대응이 미비하였는지 혹은 누군가가 행인들을 밀기 시작하였는지, 이에 따라 힘이 어느 방향으로 작용하였는지 그 모두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두를 알 수 있는 존재는 인간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 모두가 진실의 객관적 실체를 바라볼 수 없다는 관점을 견지하면 유튜브, 즉 뉴미디어의 출현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뉴미디어는 진실의 여러 면모를 향해 조명을 비출 수 있는 수단이며, 게이트키핑이 없다는 면모 또한 다양한 면모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진실의 객관적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아직은 요원하지만 뉴미디어는 적어도 그 형태에 대한 짐작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물론 뉴미디어에는 단점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 골몰하고, 토끼굴에 빠지며, 혐오는 늘어나고, 세상은 파편화된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뉴미디어를 포기할 수 있을까? 과연 유튜브가 없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술이 발전하면 긍정과 부정이 모두 부각되기 마련이다. 칼이 발명되었기에 수많은 살인 사건이 일어났지만 인류는 칼로 인해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칼의 부정적 면모가 긍정적 면모를 넘어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의 도덕 철학은 뒤쳐지기 마련이다. 기술의 눈부신 성장속도를 토론장의 철학자들과 낡은 제도는 이길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발전을 금하는 것은 인류 발전을 역행하는 주장일 것이다.결과론적으로 보면 우리 인류는 지금껏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진보해왔으며 더욱 도덕적으로 변해왔다. 극단적인 회의론자라도 과거 전쟁이 만연하던 시기와 현재의 예전에 비해 평화로워진 세계를 보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렇든 뉴미디어에 많은 단점이 있어도, 인류의 경험과 지혜는 느리지만 결국은 보완책을 마련할 것이다. 이는 인류 경험을 귀납적으로 쌓아간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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