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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17. 2024

숭고한 노동, 숙고할 노동

 이사를 오고나서 시장에 자주 들린다. 시장이 가까이 있고, 가격이 싸서 생계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시장만의 별미를 맛보는 일은 큰 즐거움이다. 이를테면 육전, 곱창. 어묵 등등 말이다. 내 다이어트를 망치는 맛있는 음식들이 시장에는 가득하다. 재미도 정도 가득한 공간이다.

 시장의 정, 그 이면에는 땀이 있다. 나는 얼마 전 육전을 구매하며 이를 느꼈다. 가게 이모는 고기에 계란물을 묻혀 불판에 올렸다. 6개의 작은 육전이 불판에 올라가 익어갔다. 이모는 계산을 하고, 손님의 주문을 받으며 육전의 상태를 확인했다. 적당할 때 육전을 여러 조각으로 잘랐고, 포장하여 나에게 검은 봉지를 쥐어주셨다. 그 와중에 시장 삼촌은 육회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모와 삼촌 모두 익숙한 듯 정확하고 빠르게 작업하였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했다.

 노동은 땀을 흘리는 행위다. 정신을 집중하고, 혹은 분산하여 여러 일을 처리하는 일이다. 허리가 아파와도 작업을 하고, 생산해내는 행위이다. 어깨 위에 있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해내야 하는 지루한 작업이다. 이모도, 삼촌도 지루하셨을 것이다. 몇 년간, 혹은 몇십 년간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오늘도 일을 하러 가야한다는 것에 몸사리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해야 했을 것이다. 해야 하니까, 책임이 막중하니까, 어쩌면 자식들이 학교를 가고 가끔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니까, 시장에 출근하셨을 것이다. 노동이란 희생이다. 또한 생계를 책임지는 행위이고, 인류가 대를 이어가며  내려온 숭고한 유산이다. 누군가의 노동은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 삶을 위해 참아내는 행위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당신도 그러십니까, 저도 지루한 일을 하러 출근해야 합니다.' 같은 연대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숭고하지 않은 노동도 있을까? 당연히 모든 노동이 숭고하지는 않다. 어떤 노동은 땀을 흘리지도, 생산적인 행위를 하지도 않는 일이다. 예를 들면 성매매를 업으로 삼는 것이 이런 노동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여 타인을 만족시키는 것이 숭고한 행위일까? 어쩌면 자신을 격하시키는 행위는 아닐까?

 이런 의문에는 여러 대답이 따를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숭고함에 대한 난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의견도 계속하여 일관되지는 않았다. 몇 년 전까지는 성매매도 하나의 노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행위니까.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고 어쩌면 그들만의 노력이 있을 테니까.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까. 이런 이유들로 나는 성매매 종사자들도 노동자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해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마음 편히 비판할 수는 없다. 사회가 절벽으로 내몰고 있는 이들이 부도덕한 선택을 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의 선택은 최하층으로 내려가 자신을 도구 삼아 노동하는 것일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성이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노동이 숭고하다는 근거로 나온 주장이다. 노동은 주체성을 가지고, 작업하고, 땀을 흘리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니까, 성매매가 진정한 노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혹자는 내가 편한 위치에서 그들의 입장을 겪어보지도 않고 편하게 매도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너는 가난해보았냐고, 너의 생계가 위협받은 적이 있냐고, 절벽 앞에서 아득한 밑을 쳐다본 적이 있냐고.

그들이 옳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용돈을 받아가며 편하게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가난을 체험한다면, 나도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유리한 입지에서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엄성이고, 노동의 숭고함이고, 이런 모든 가치들은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버릇일지도 모른다. 생존의 위협을 느껴보지 않았다면 이런 가치를 논할 가치가 없을 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시가 예전에 읽은 책에 있었다. '삶의 격'이라는 책이었다. 저자는 유럽의 어느 지역을 방문하여 '난쟁이 던지기 대회'를 지켜보았다. 키가 작은 사람인 난쟁이를 힘이 센 남자가 빙글빙글 돌리다 투포환처럼 던지는 대회였다. 저자는 이 대회를 보고 경악했다. 물론 안전장치는 있었지만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는 난쟁이 한 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 대회는 부당하지 않느냐고, 이는 자기 자신을 도구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난쟁이의 대답은 경종을 울린다.' 이보쇼! 당신 같이 똑똑한 사람들은 널린 게 직업이고 아무 거나 할 수 있겠지만, 나처럼 키가 작고 배척당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소.'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저자가 안일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쟁이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그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속 편하게 난쟁이에게 직접 부당함을 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생존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발전하여 편해졌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고향 아프리카의 초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의 천적은 상사, 정치인, 부자 등이며, 우리는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부와 눈치를 활용해야 한다. 먹이를 찾는 일은 여러 가지로 분화하였다. 시장에서 음식을 파는 일,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일, 프로그램을 코딩하는 일 등으로 우리는 식량을 보충한다.

생존은 인간에게 주어진 지고의 가치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쓴다. 취직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더 나은 직장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출근 버스에 오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똑같이 고생하지는 않는다. 우리 머리 위에서 호의호식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경쟁하지만, 더 많은 부를 위하여 경쟁할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생존하고 자식을 기르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반면 더 밑에 있는 사람도 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이들이 그 전형적 예시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핑계가 있다고 해서 더러운 일이 더럽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숭고하지 않은 일이 숭고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동정의 여지가 생길 뿐이다. 공감하고, 마음이 아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비판은 자유다. 존엄성과 노동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라는 단어가 더해질 뿐이다.

관점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입장이 갈린다. 취향에 따라, 교육받은 바에 따라, 자신의 계층에 따라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이제서야 많은 도덕책들이 무엇이 옳다고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정답은 없다. 입장만 있을 뿐이다.

 여전히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들은 나에게 감동을 준다. 나의 생각은 대체로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어떻게 이 힘든 일을 00년 간 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작년에 세금계산서 발행을 주 업무로 회사에 다녔다. 하루종일 전화를 받고, 메신저를 받고, 타이핑을 하고, 틀린 건 수정하였다. 하루 종일, 일주일에 5일간. 그렇게 6개월을 버티다가 나는 백기를 들었다. 퇴직해버린 것이다.

 나의 퇴직은 다른 단어로 치환된다. 도망이다. 나는 직장에서 도망쳐 나왔다. 아까운 일이다. 내 계획은 1년 동안 일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번아웃이 심하게 왔었다. 우울증으로 입원 권고를 받았다. 스위스에서는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일을 했지만, 나는 노동의 힘겨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다시 학생이라는 자리로 도망쳐왔다.

 왜 우리는 일해야 하는 걸까? 누가 인간에게 노동이라는 과업을 부과한 걸까? 내가 고생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들이 노동에 질리고, 노동 때문에 슬프고, 노동 때문에 답답할 텐데, 노동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더 편하게 살 수는 없을까? 그냥 돈만 받고 살 수는 없는 일일까?

 많은 이들이 한숨을 내뱉는다. 하루 8시간은 너무 길다는 의견이 많다. 주 4일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다들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노동으로, 힘겨운 일로 가득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일을 더 적게 할 수 있다면, 혹은 아예 안 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변화한다. 운명이라는 것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여러 나라가 주 4일제를 실험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개발로 특이점이 곧 찾아온다는 의견이 주류다. 시민에게 기본 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특이점이 온다. 기술적 특이점과 노동의 특이점이 같이 오고 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가까워지고 있다.

 생존은 더 이상 우리의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일을 하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자리는 무엇이 차지하게 될까? 자기계발, 수다, 취미, 산책으로 가득하게 될까? 어쩌면 지루해지지 않을까?

 일이 없어지면 인간은 당황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루 8시간 일하다가 그 8시간 동안 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니까 말이다. 퇴직한 노인들이 심심하여 취미로 노동하는 경우가 증명해준다. 심심풀이로 일을 하고, 봉사를 하고,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보여주려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해."

 어쩌면 노동의 특이점 이후에 사람들은 새로운 노동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어떻게든 할 일을 만들어내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흔해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을 지도 모른다. 노동이라는 명령이 유전자 하나하나에 적혀있을 수도 있다.

 노동은 어렵다. 노동하는 것도 어렵고,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어렵다. 노동은 스트레스를 주고, 인간 삶을 어렵게 하면서도,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은 노동하기를 원하고, 노동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노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기를 원하고, 생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도구로 격하시키면서까지 노동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노동은 수단이기도, 목적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해야지만 사회의 노동을 이해할 수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사회의 노동자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숭고한 노동부터 숙고해야 할 노동까지, 편한 노동부터 힘든 노동까지, 이 모두를 똑바로 쳐다보아야만, 당신도 제대로 노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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