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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17. 2024

이너피쓰, 부표, 눈사람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누군가가 내 마음 속엔 이너피쓰란 것이 결락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너피쓰, 마음의 평안, 열반으로 향하는 길 위의 쉼터. 그런 것들은 어쩌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나에겐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건 아마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일거다.

 부표처럼, 바다 한가운데 휑뎅그렁하게 놓여있는 부표처럼, 파도가 치면 힘에 밀려나고, 강한 바람이 그저 가볍게 밀어버릴 뿐인 부표처럼,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니까.

  심해의 거대한 괴물이 기지개를 펴면 영문도 모르고 뒤집어지려 하는 부표는 그 어떤 곳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적막한 바다를 유영하고만 있다, 끊임없이, 어쩌면 영원히도. 아마도 이너피쓰란 것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심해의 어둠을 바라보는 부표는 아닐 것이다.

 엊그제로 돌아가보자. 함박눈이 길거리에 소복히 쌓여있던 그날은 추위가 뼛속으로 아리도록 스며들던 날이었다. 하늘엔 두터운 구름만이 보였고, 땅엔 하얀 눈만 쌓여있던 장면에서 위아래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무기력이 추위와 더불어 내 뼈를 잠식한 것만 같았다.

 추위는 반복되니까, 겨울은 돌아오고, 또 1년을 먹어가니까. 매년 겨울 추위와 함께 느끼는 연말의 후회와 무기력은 연례행사가 되어 내 삶의 부분으로 착실히 쌓여가고만 있었다. 그런 겨울에, 엊그제 내가 느낀 것은 성장의 결여였다. 성장의 결여라 함은, 작년 겨울의 내 감정과 소회와 경험이 올해 겨울의 나와 지독히도 똑같은 것만 같다고, 발걸음 저벅저벅하는 소리를 지워갈만큼 크게 외치는 내면의 지독한 메아리였다.

 내가 증오하기를 가장 마다하지 않는, 자기반성을 거부하여 어른아이로 수십년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누가 더 큰 눈뭉치인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눈사람을 만들 때, 눈을 뭉쳐서 굴리다보면 어느순간 맨처음의 눈뭉치는 매우 작은 부분으로 안에 침전하고, 덕지덕지 다른 눈들이 붙어 눈사람으로 행세한다. 어쩌면 사람도 눈사람처럼, 자신의 어릴 적 자아는 숨겨두고 살아가면서 방어기제만 잔뜩 불려두고, 성장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오는 날, 줄지어 미소짓고 있는 눈사람들처럼, 누가 더 큰 눈사람인지 경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추운 겨울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너피쓰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바다위의 부표이니까, 어떤 겨울날 추위도 바다를 다 얼려버리지는 못하니까, 부표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부표, 그 위로 착실하게 눈을 덧붙여서 만든 눈뭉치, 그 위로 아름다운 미소와, 착실하게  붙인 나뭇가지를 더해 만든 눈사람을 보라. 그것이 겨울날 전시되는 이너피쓰가 없는 어른아이들의 자아이다.


추운 겨울날, 우울할 때에 적은 글.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정말 빠르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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