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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23. 2024

동거는 살금살금

서울특별빌라 시리즈 3 (508호의 시점)

 “칫솔은 화장실 선반으로, 베개 하나는 옷장 안으로 집어넣고, 또 치울 거 있나?” 내가 말했다.

 “음 글쎄? 없는 거 같은데, 생각 한번만 더 해보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체크리스트를 머릿속에서 다시금 맞춰보았다. 칫솔, 베개, 화장품. 아, 선반 위에 있는 화장품과 각종 플라워향 향수들을 치워두어야 했다. 나는 20대 건장한 남성으로서 화장품과 향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타당한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도 나는 그렇게 뷰티용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대충 각종 물건들을 서랍 안에 집어 넣고는 정리를 마무리 했다. 그리곤 그녀와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우산과 가방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친 채였다. 나는 그녀를 역까지 데려다주기로 하였다. 역으로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론 앞으로 우리가 못 볼 며칠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이 집에 오시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길었던 동거에 잠시 휴식기가 생긴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하루종일, 정말로 말 그대로 온종일 붙어있는 것은 내 사랑의 범위를 어느정도 초월한 수준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녀를 데려다 주며 걱정과 기대를 같이 안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걸어갔다.

 그녀를 열차 플랫폼으로 보내고 난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을부터 시작된 길었던 4개월 간의 동거는 잠시 부모님의 방문으로 중단될 예정이었다. 칙칙한 회색 서울특별빌라 508호에 부모님이 오시는 이유는 짐작컨대, 하나뿐인 아들이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이를테면 청소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함인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이에 더해 어머니는 탐정처럼 어디 여성의 흔적이 있는지 찾아내려 애를 쓸 것이었다. 물론 여성의 흔적은 있다, 아니 있었다.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존재하던 흔적들을 나는 모두 숨겨 어딘가에 쳐박아버렸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집안이 오랜만에 반짝하게 광이 나는 것이 보였다. 뿌듯함과, 지금까지는 뭐 하느라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자괴감이 같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솔직히 말하자면 위생관념이 별로 없는 편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내가 그녀의 위생관념에 맞추는 수밖에는 없었다. 서로를 위하여 어느정도 양보하는 것이 동거의 지혜였다.

 그녀와의 동거는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우산을 걸어놓는 철제 바가 생기기 전에 펼쳐놓은 우산들 가장자리로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야 했던 것처럼, 서울특별빌라에서, 그것도 5층에서 동거하는 것은 ‘살금살금’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501호부터 505호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두꺼비처럼 볼이 탐욕에 부풀어있는 집주인의 집이 501-505호였다. 물론 그 호수들은 원룸이 아니었고(추측이지만, 거의 사실에 가까웠다.) 하나의 가정집처럼 배치되어 있을 거라는 것이 서울특별빌라 주민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는 508호, 505호와 멀다면 멀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울특별빌라는 건축자재를 어딘가에서 잘 뽑아다가 썼는지, 방음에 대한 우리의 기대의 정도를 항상 배반하였다. 나는 506호와 507호 주민이 언제 돌아오는지, 언제 알람이 울리는지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이게 다 서로 간 잘 알게 해주려는 서울특별빌라 건축사의 배려가 아닌지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배려는 나에게는 독이 되었다. 난 25살의 건장한 청년으로서 조선 시대였으면 이미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을 나이이지만, 왕조가 망하고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선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여자와 같이 살면, 이게 뭔 나라가 망할 징조인지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505호에 내 동거의 소리가 들릴 까봐 나는 항상 집에서 귓속말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밖에는 없었고, 복도에서도 살금살금 다닐 수밖에는 없었다.

 부모님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오셨다.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서는, 냉장고를 먼저 열어보시고, 어디 먼지 한 톨 더러운 꼴이 있나 방을 열심히 스캔하시고는, 내가 깔끔하게 집을 치워둔 것을 보고 안심하신 듯 하였다.

 “사람같이 사네, 우리 원이”

 “그래, 이정도면 됐다,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부모님의 안심하는 대사가 이어졌고, 나는 부모님에게 드릴 커피를 내어왔다. 침대에 부모님과 일렬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원룸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서울특별빌라가 얼마나 칙칙하고 집주인은 얼마나 자주 마주치게 되는 지를 열심히 보고하였다. 물론 내가 동거를 한다는 거대한 진실을 빼고 이야기하느라 많은 부분이 거짓으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부모님과의 조우는 따듯한 행사였다. 서울특별빌라의 회색 복도가 훈김으로 가득채워지는 듯했다.

  시간은 금세 흘러가 저녁이 되었다. 저녁식사로는 부모님과 밖에 나가 고기를 구워 먹었다. 고기를 구워먹으며 학점에 대해, 과제에 대해, 술자리에 대해 보고하였으며, 내 학교생활이 전반적으로 정말 온전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분히 애를 썼다. 부모님은 고기 두세 점을 집어 드시다가, 소주를 한 병 시키시는 걸로 나를 안심시키셨다. 내가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했으면, 집에 동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면, 부모님은 만족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소주를 마시기는커녕 한숨을 쉬시느라 정신이 없으셨을 게 눈에 선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불콰한 얼굴로 모두 노래방으로 향했다. 내 열창을 듣고 탬버린을 흔드시는 어머니, 80년대 대중가요를 열창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내 추억의 한칸에 보관해두었다. 부모님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부모님을 역으로 데려다 드렸다.

 “그래, 잘 사는 거 보니 안심이다 원아”

 “서울 생활 잘하네, 이렇게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훈훈한 대사를 마지막으로 부모님은 열차를 타러 가셨고, 나는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 주변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오랜만에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넷플렉스와 치킨, 맥주로 때우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편의점에 들어섰다. 편의점 야외 테라스가 북적이는 게 보였다. 두꺼비같은 우리 집주인과, 피부가 탱글한 할머니들, 등산복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보였다. 테라스 테이블에는 고작 과자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재개발을 하는데 보상금이 너무 쥐똥만하다니까”

귀에 대사가 꽂혀왔다. 최근 서울특별빌라 근방은 재개발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낙후된 근린시설을 살펴보면 누구라도 동의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집주인들은 동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부가 제시한 보상금 계획안이 그들의 입맛을 돋우기에는 부족한 탓이었다. 최근 편의점에서는 집주인들의 대책 회의가 이어졌다. 서울특별대학교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에는 <돈도 많은 양반들이 굳이 편의점에서 회의를 하네> <카페 갈 돈 아껴서 집주인 되었다고 하네요>같은 글이 올라와 집주인들을 비판하였다. 나는 편의점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두꺼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 그래 학생, 공부는 잘하고 있고? 아니, 이 학생이 그렇게 들어가기가 빡센 서울특별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학생이에요”

 옆의 집주인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다들 웃고 있었지만, 비웃음이었는지 진짜 웃음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자격지심이 느껴졌다. 내가 글로벌경영학과로 아무리 잘나가봤자 건물 하나 사기는 커녕 내 집 마련조차 어려울텐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건물주가 된 건지 궁금하였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었고, 나는 목례를 하고 캔맥주를 고르러 진열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편의점 밖을 나서려는 순간 집주인이 나를 불렀다.

 “아 맞아, 학생”

 “네?”

 “아니, 그냥 우리 계약서 한번 잘 읽어보라고”

 “왜요?”

 “있어, 그런 게. 잘 읽어봐, 학생“

 나는 집으로 미심쩍게 돌아왔다. 오랜만의 자유시간을 치킨과 넷플렉스와 함께 보내려던 내 계획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랍을 뒤적거리다 저 구석에 쳐박아놓은 계약서를 꺼내 보았다. 눈으로  계약서의 빼곡한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가 ‘임대차 계약은 1인 거주를 원칙으로 한다’라는 문장이 뇌리에 들어왔다. 순간 두꺼비에 대해 무수히 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수치심, 부끄러움, 분노, 두려움, 모든 것이 집주인을 향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보았다. 월세를 더 받으려는 수작인가, 혹은 보증금을 돌려줄 때 계약위반을 사유로 더럽게 나올 수작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쥐가 듣고, 두꺼비가 듣는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나는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그저 넷플렉스와 유티브를 보며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고, 맥주를 몇캔 마시고, 청소를 대충 해놓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와 대책회의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녀에게 알리지 말고 일단 나만 알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천성이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라, 이를 알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조용히 있는 일상에서 숨구멍조차 트지 못하고 살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를 알리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돌아왔다. 본가인 과천에서 며칠을 지내고 난 후 살이 포동포동하게 쪄서 돌아온 모습이 귀여웠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그녀가 나와 동거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분은 오픈 마인드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셨고, 그녀의 동거를 지지해주었다. 딸 여럿에 아들 여럿 있는 대가족이라고 해도 어떻게 딸의 동거를 그렇게 용인해 줄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워낙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다양한 마인드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이를 그저 오히려 좋다고 넙죽 받아드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굴러다니는 맥주캔을 보고, 낮잠을 자느라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고,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숙취에 찌든 몸을 이끌고 분리수거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나서야 그녀를 껴안았다. 나는 그녀의 체취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샴푸 냄새, 향수 냄새, 그리고 안기 딱 좋은 사이즈의 뱃살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두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가려고 엘리베이터에 타서 새로운 공지문을 읽었다. 내용은 이러했다.‘가스비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다들 절약 부탁들입니다’ 집주인은 정말 맞춤법 교육을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나는 집주인의 마수가 나의 영역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듯하여 배가 울렁거렸다. 서울특별빌라의 관리비에는 가스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후지기로 유명한 서울특별빌라로써는 특별 서비스에 가까운 혜택인데, 아무래도 가스비의 거취를 정할 때 집주인이 기분이 매우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공지가, 어느 정도 동거 남녀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계약서에 적혀 있던 특약 조약과, 가스비, 이 둘은 집주인이 동거 남녀를 쫓아낼 수 있는 빗자루였다. 나는 두꺼비 집주인이 이 빗자루를 휘두르며 나와 그녀를 내쫓는 상상을 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오래 머문 자는 향을 남기고 가는 법, 머문 자리에는 먼지가 묻어 있지 않는 법이었다. 그녀를 집주인이 보고야 만 것이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조용히 타던 그녀였지만(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복도에서 살금살금 조심히 걷는 모습을 집주인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을 간파해내지는 못했다. 눈이 뒷통수에 달려있지는 않은 게 사람의 육체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앉아 안색이 파래해진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의 추궁에서야 결국 입을 연 그녀였지만, 나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만 본 것으로는 그녀가 여기서 산다는 것을 확신할 수도 없고, 그저 놀러온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합리적인 의견을 개진하였다. 물론 적절한 위로와 함께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 의견은 적절한 의견이 아니었다. 집주인은 분명히 내가 그녀와 동거하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서울특별빌라에서는 서로간에 모르는 일이 없었다. 나는 집주인의 거미줄에 붙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집주인을 두꺼비가 아니라 거미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에도, 헬스장에서 운동을 할 때에도, 하나의 질문을 머릿속에서 반추하였다. ‘부모님이 내가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하지?’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본가로 귀양을 갈 것이며, 1시간 30분 거리의 학교를 통학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정말 싫었다. 아마 부모님은 나에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며, 내 착한 아이 이미지는 완전히 망가질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매우 싫었다. 그렇지만 더더욱 싫었던 것은 내가 그녀와 같이 사는 지금의 행복한 생활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란 사실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나는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어떤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올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있었다. 요리를 하다가도,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얼음이 되어 가만있던 게 그녀였다. 그녀는 섬세하였고, 조심성이 많았다. 그래서 그 전화가 올 때 그녀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아 집주인 문자 왔는데, 너네 집 가스비가 너무 나온다고 주의해달라는데? 근데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난 모르겠다. 가스비가 많이 나올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가지고 주의를 달라고 나한테 문자를 넣는지 모르겠다. 너네 집주인 이상하다고는 들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사람이야”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그니까 말이에요, 일단 난방 적게 틀어야죠. 근데 나도 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네요” 내가 말했다. 이 순간에 그녀는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녀는 뜨거운 후라이팬에 데이고 말았다. 너무 놀라서 잠깐 입을 틀어막으려다가 손이 후라이팬에 닿은 탓이었다. 나는 그녀가 매우 걱정되었지만 이를 티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최대한 조심히,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화상 입은 곳을 씻어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물은 졸졸 흐르는 채였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일단 알겠어요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감정이 격해진 것을 최대한 꾹꾹 누르며 이야기했다.

 “그래 집 잘 치우고 살고, 난방은 한동안 약하게 틀어라 어쩌겠냐” 어머니의 전화가 끊겼다. 나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그녀의 상처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화상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괜찮아? 병원가야하는 거 아냐?”

 “아냐, 이 정도면 물로 잘 씻어내면 금방 나을 거야, 그리고 지금 응급실 가야해, 저녁이잖아.” 시간은 어느새 노을이 어둑하게 질 시간이 되어버렸다. 병원에 가려면 확실히 응급실에 갈 수 밖에는 없을 터였다.

 “그럼 내가 약 사올게, 좀만 기다려”

 나는 얼른 후드 집업과 우산을 챙기고,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엘리베이터 앞에 집주인이 있는 것이 보였다.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집주인과 나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학생 어디가? 비도 오고 늦었는데” 나는 집주인의 오지랖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실형을 살고도 남을 오지랖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지식했다. 나는 나의 고지식함도 지독하게 싫어졌다. 나는 거짓말을 정말 잘 못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동거를 한다는 사실을 숨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터였다.

 “잠깐 약국이요” 이런, 나는 저지르고 말았다. 약국에 간다고 정말 굳이 굳이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내가 나도 답답해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하였다. ‘화상약 사러 간다고만 말 안하면 돼’ 나는 다음 거짓말 시나리오를 만들어두었다.

 “배가 아파서요, 잠깐 소화제를 사야 될 것 같아요.” 내 새파래진 안색과 잘 들어맞는 알리바이였다. 나는 이 거짓말을 멍청한 집주인이 제발 믿어주기를 기도하였다.

 “아이고, 큰일이네, 우리 집에 비상약 있는데 줄까? 다시 올라가면 되는데” 지독한 오지랖.

 “아니에요, 약국 갈게요, 괜찮아요” 지독한 오지랖과 지독한 예의바름의 싸움이었다.

 “학생 사양말고 올라와”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얼른 서울특별빌라 앞에 있는 약국을 향해 뛰어갔다. 우산을 펼치는 것도 잊은 채, 얼른 약국에 가서 화상약을 사 왔고, 서울특별빌라로 돌아왔다.

 나는 최악을 맞이하러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늦장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거미줄에 칭칭 감긴 벌레와 같은 처지였음이 분명했다. 담배를 다 핀 집주인이 다시 서울특별빌라로 들어서려 했다. 약국이 가까운 서울특별빌라는 빌어먹을 최고의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다. 집주인은 담배를 집안에서 피지 않고, 자신의 건물에 담배냄새를 배게 하지는 않는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지금 늦장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맞물려 나의 행동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집주인과 5층에 가야만 했다.

 “학생, 홀딱 젖었네, 우산도 있으면서, 왜 그랬대”

 “그러게요, 가까워서 그냥 뛰어가면 될 줄 알았나봐요 하하”

 “배는 좀 괜찮아? 우리 집에 약 많은데, 어디 무슨 약 샀어?” 나는 약봉투를 얼른 치웠다.

 집주인의 미간이 찡그러졌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럼 그렇지’ 그 표정의 의미였다. 그는 오지랖이 넓었고, 눈치가 빨랐고, 심지어 청력과 시력마저 좋았다. 나는 그가 지독하게 원망스러웠고, 그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만든 모든 상황을 저주했다. 그는 모든 것을 눈치챘고, 나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1층에서 5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영겁은 아니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목례를 하고 얼른 집을 향해 뛰었다. 빗물이 뚝뚝 내 몸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 집주인이 나를 불렀다. 지독했다. 정말로 지독했다.

 “아 맞다 학생, 그 가스비”

 “네?”

 “아니, 그냥 신경쓰지 말라고 가스비, 겨울이면 난방 틀어야지 어쩌겠어”

 “감사합니다”

 나는 집주인이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그가 무엇을 더 요구할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가스비 소동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큰 무대를 준비하는 그의 뒷모습을 한 대 때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고,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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