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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왜 하필 1000일 일까요?

생애 첫 1000일이 특별한 과학적 이유

by 행복한 소아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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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동포동 얼굴이 귀여운 아기가 "피부 발진"을 주소로 내원하였습니다.

아기는 볼이 특이 통통하고 예뻤지만, 안타깝게도 양쪽 뺨과 턱 주변에 피부발진이 심하게 올라오면서 일부는 진물이 올라올정도로 상처가 생겼습니다. 귀, 눈 주변으로도 발진이 생기면서 긁었는지 상처도 생겼어요.


엄마는 "우리 아기 아토피 인가요? " 허겁지겁 질문하십니다.

"우리집엔 아토피가 없어요. 저도 신랑도 알레르기나 비염도 없고요.. 혹시 자연분만 안해서 그럴까요? 아님 모유 안먹인거때문에요?"

엄마들의 질문의 끝은 늘 자기탓으로 마무리 됩니다.


상식적으로 그만 둬도 될것 같은 상황에서도 모유수유를 고집하는 이유도, 그것이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아기에게 엄마가 줄 수 있는건 좋은 모유나, 자연분만의 유산균 사워만 있는건 아닙니다.

인터넷이, 자연분만하면 머리가 좋다더라, 모유수유 하면 면역력이 좋아진다더라, 3살까지 엄마가 데리고 있으면 애기 사회성이 좋아진다더라, 이런 카더라의 말들로 부모들을 비상식적으로 옭아 매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가 틀린거냐구요? 전혀 틀리거나, 아주 거짓말은 아닙니다. 연구가 되어오고 있고, 실제로 어느정도 근거도 있습니다만, 그게 100%는 아니라는거죠.


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아기에게 줄수 있는 좋은 양육에는 자분이나, 완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는 부모가 무책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만 세살까지 꽉꽉 채워서 가정보육하는 엄마의 모성애가 칭찬 받을 만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해요.


생애 첫 1000일,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수정되는 순간부터 세어서 1000일째 되는 날까지를 말합니다. 대략 임신 9개월에 생후 2년, 즉 만 2세까지입니다.

왜 하필 1000일일까요? 999일도 아니고, 1001일도 아니고.

사실 정확히 1000일이 마법의 숫자는 아닙니다. 이건 과학자들이 만든 하나의 '프레임'입니다. 기억하기 쉽고, 정책을 만들기 좋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편한 숫자죠.

하지만 이 시기가 특별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이 시기는 인간 발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때입니다. 한 개의 세포가 수조 개의 세포로 늘어나고, 뇌에서는 매초 백만 개의 신경 연결이 만들어지며, 장에서는 평생 함께 살아갈 미생물 친구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나는 일들이, 평생의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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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 가소성"이라는 마법 같은 능력

인간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과학자들은 이를 '발달 가소성(developmental plasticity)'이라고 부릅니다.

플라스틱처럼 유연하게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춥고 배고픈 환경에서 태어날 것 같다? 그럼 에너지를 아껴 쓰도록 몸을 만들어두자. 세균이 많은 환경인가? 면역체계를 더 강하게 준비시키자.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인가? 위험에 더 빨리 반응하도록 신경계를 세팅해두자.

이런 적응은 우리를 다재다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북극에서도, 사막에서도, 고산지대에서도 살 수 있게 해주죠.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즉각적인 환경에 적응하느라 만든 변화가, 장기적으로는 비용을 수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뱃속에서 영양이 부족했던 아기는 태어난 후에도 조금만 먹어도 에너지를 저장하려는 '절약형' 몸을 가지게 됩니다. 이건 실제로 배고픈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생존에 유리하죠.

하지만 만약 태어난 곳이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라면? 그 절약형 몸은 비만과 당뇨의 위험을 높입니다.

이것이 적응의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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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장, 면역이 함께 춤추는 시간

생애 첫 1000일 동안 인간의 몸에서는 세 가지가 폭발적으로 발달합니다.

첫째, 뇌입니다.

태어날 때 뇌 무게는 약 400g. 돌 때 1000g. 두 돌 때는 성인의 80%인 1200g에 이릅니다. 단순히 크기만 커지는 게 아닙니다. 매초 백만 개씩 신경 연결이 만들어지고, 필요 없는 연결은 가지치기되고, 수초화가 일어나면서 신호 전달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 시기에 뇌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평생 사용할 뇌의 기본 설계를 만듭니다.


둘째, 장입니다.

최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 장은 '제2의 뇌'라고 불립니다. 장벽을 펼치면 테니스 코트 크기가 되고, 그 안에는 뇌 다음으로 많은 뉴런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장에는 평생 함께 살 미생물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세균이 아닙니다. 우리 면역의 70%를 담당하고, 기분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만들고, 비타민을 합성하고, 우리가 먹는 음식의 일부를 우리가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줍니다.

이 시기에 어떤 미생물들이 자리 잡느냐가, 평생의 장 건강, 면역 건강, 심지어 정신 건강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셋째, 면역체계입니다.

태어날 때 아기의 면역은 백지상태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엄마에게서 받은 면역으로 버티는 상태죠. 그리고 생후 첫 몇 년 동안 세상의 수많은 세균, 바이러스, 물질들을 만나면서 "이건 위험한 것, 이건 안전한 것"을 학습합니다.

이 학습이 제대로 안 되면? 알레르기가 생기거나,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거나, 감염에 취약해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뇌, 장, 면역—는 따로 놀지 않습니다. 서로 긴밀하게 대화합니다. 장이 불편하면 뇌가 신호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면역이 떨어지고, 면역에 문제가 생기면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통합된 마음-뇌-신체 시스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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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시기를 망치면 끝인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생애 첫 1000일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 시기가 기회의 창이라는 뜻이지, 이 시기를 놓치면 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발달 가소성은 생애 첫 1000일 동안 가장 크지만, 평생 유지됩니다. 뇌는 30세까지 발달하고, 장은 평생 변할 수 있고, 면역은 언제든 재교육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도 중요한 가소성의 시기입니다. 성인기에도 변화는 가능합니다. 다만 생애 첫 1000일보다는 더 강하고 지속적인 환경의 변화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들 중 일부는 되돌릴 수 있습니다.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수정될 수 있습니다. 텔로미어 손실은 복원될 수 있습니다. 짧아진 텔로미어를 늘릴 수는 없지만, 더 이상의 손실을 막고 변화 후 복원할 수는 있습니다.

네, 일부 변화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신장의 네프론 숫자, 췌장의 췌도세포 숫자, 최대 골밀도 같은 것들은 생애 첫 1000일에 거의 결정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부모님들을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죄책감을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정보가 있으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을.

제왕절개로 낳았어도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모유수유를 못 했어도 괜찮습니다. 대안이 있습니다. 임신 중에 스트레스를 받았어도, 영양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저는 생애 첫 1000일 동안 우리 아이들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최신 과학이 무엇을 밝혀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하려 합니다.

후성유전학, 장-뇌 축, 마이크로바이옴, 신경염증... 어려운 단어들이지만 걱정 마세요. 하나씩 쉽게 풀어드릴게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나는 이것도 못 했네, 저것도 잘못했네" 하며 자책하지 마세요.

세상이 어디 사람 마음처럼 되나요.

누구나 최선을 다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진 정보로,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과학자들이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완벽한 상황이 아니어도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울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

다음 편에서는 '마음, 뇌, 몸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특히 장과 뇌가 어떻게 대화하는지, 왜 "잘 먹고 잘 싸는 아이가 잘 자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해드릴게요.

우리는 답을 찾을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이. (찡긋)



다음 편 예고
2화: "마음, 뇌, 몸은 하나입니다" - 장-뇌 축의 비밀


이 연재는 최신 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하되, 어려운 의학 용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합니다. 궁금한 점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음 편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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