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당신은, 금수저가 아닌가요?

말의 계급인가, 마음의 상처인가

by 추지원

안녕하세요.
브런치스토리 새내기 작가, 추지원입니다.


아직은 서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제 글을 따뜻하게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써본 실험적인 단편 소설입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소설’의 형태로 꺼내보았습니다.


이번 작품은 2회 분으로 나누어 연재될 예정이에요.
부디 따뜻한 시선으로, 끝까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


1회 차

제목: 그럼 당신은, 금수저가 아닌가요?

부제: 말의 계급인가, 마음의 상처인가


구성:

프롤로그

제1장 금수저

제2장 거지근성


2회 차

제목: 복잡한 이해에 대하여

부제: 모호함을 견디는 일에 대하여 (혹은) 이해라는 이름의 온기


구성:

제3장 그들은 그렇게 웅크렸다

제4장 장애인과 강아지

제5장 복잡과 무지




프롤로그


맥주를 마셨다.

술이 약한 나는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이 글은 아마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겁쟁이니까.


미움받는 걸 무서워하고, 내가 옳은지 확신도 없고,

그리고 내 생각들이 누군가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비밀이란 원래 그렇다.

보이지 않는 틈새로 스멀스멀 새어 나와, 결국엔 제멋대로 퍼져버린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어쩌면 내 조용한 반란일지도 모른다.


제1장 금수저


요즘은 사람의 출발점이 수저의 색으로 구분된다.

‘금수저.’

나는 그 단어의 기원을 알지 못하지만,

그 안에 계급을 나누려는 오래된 의도가 스며 있음을 느낀다.


‘금수저’라는 말은 언뜻 누군가를 높이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비꼼이 숨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손에 쥔 사람을 가리키는 말.

그 한마디에 누군가는 축복을, 또 누군가는 억울함을 담는다.


어떤 이는 그 말을 농담처럼 던지지만,

누군가는 그 단어 앞에서 평생의 열등감을 삼킨다.


‘금수저’는 단순히 계급을 가르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안의 불안과 불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만들어낸

가장 정직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 말을 내뱉는 이들이

무심히 자신과 자신의 부모에게도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말에 동의하며 스스로의 삶과 사랑하는 이들의 가치를

조용히 깎아내리고 있는 셈이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구분은 단순한 계급의 언어가 아니다.

그건 사회 구조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동시에,

각자가 느끼는 자존감의 흔들림과

자기 위치에 대한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결국 이 단어들은 누군가를 규정하기 위한 꼬리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은 상처와 갈등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금수저’라 부르는 이들은 사실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소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때때로 ‘금수저가 아닌 다수’보다 훨씬 큰 무리를 형성한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

즉 사회가 만들어낸 불평등의 희생자라는 이름 아래 모인다.

그리고 그들의 결핍과 분노만큼이나

뜨겁고 강렬한 공감이 그들 사이를 채운다.


하지만 그 모든 분노와 공감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자주 잊는 사실이 있다.


사랑으로 낳아준 부모 모두가 ‘금’이지,

‘흙’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스스로의 삶을 조금씩 덜어내어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일이다.

그 마음의 출발점이 이미 ‘금’이다.

누구의 시작도 흙일 수 없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그 금이 닳고,

먼지에 덮여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수저의 색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을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잠시 잊으려 한다.


James Surowiecki의 『군중의 지혜』에 따르면,

집단은 때때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동조 압력과 편견에 휩쓸려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중은 언제나 현명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장 감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무리를 믿고, 그 속에 안주하려 한다.

비슷한 의견은 또 다른 동의를 불러일으키며 점점 더 커진다.


그들에 따르면 금수저는 고생을 모른다.

고생하지 않았기에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하고,

진심 어린 공감이나 동정 같은 감정이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좋은 교육은 재정적인 지원 아래 손쉽게 받으며,

금수저의 힘이 배경이 된 인맥 역시 쉽게 얻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점은,

그들이 금수저가 아닌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 대중의 의견이 오류로 치우치기 쉽다는 점을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금수저에 대한 그들의 비판이

완전히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어떤 금수저들은 고생을 모르고,

그로 인해 공감 능력이나 인간적인 면에서 결핍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현실에서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대중의 분노와 비판이

때로는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진짜 불평등과 부조리,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믿는다.


완벽한 답은 없다.

하지만 그 미묘한 진실들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2장 거지근성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거지근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단어는 내 피부에 소름을 일으킬 만큼 무서웠다.


‘거지근성'

사람의 존재를 찢어버리는 말이 정말로 쓰이고 있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대화 상대 모두가 이미 그 단어에 익숙할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미술 전공하는 애들 중 부잣집 딸들이 많아.

내가 대학 다닐 때 그걸 얼마나 느꼈는지 알아?

무시당하는 그 기분, 경멸 어린 시선 말이야.

걔들이 어려운 말 써가며 우아한 척하는 거 얼마나 거슬리는데.


솔직하게 다가가면, 결국 돌아오는 말이 뭔 줄 알아?

없는 애들에겐 거지근성이 있다는 거야.”


그날 그녀는 ‘거지근성’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꼴통’이라는 표현도 썼다.


듣자마자 낯설고 무서운 단어들이었지만,

솔직히 지금도 그 말들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모른다.


‘거지근성’이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된 건,

몇 해가 지나서였다.


참 이상하다.

그런 단어는 한 번 들으면 가슴 어딘가에 낙인처럼 찍히는 법인데,

그 말은 내 기억의 틈을 조용히 지나갔다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다시 나타났다.


내 친구 중에 유난히 부유한 아이가 있었다.

그 집은 단순히 ‘돈이 많은’ 집이 아니었다.

대대로 부자였고, 무엇보다 돈을 다루는 태도가 달랐다.


할아버지는 중소기업 회장이었고,

아버지와 삼촌들은 자회사를 하나씩 맡고 있었다.


자본의 구조조차 잘 정돈된 곳.

말하자면, 부의 설계도가 세대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집이었다.


고맙게도 친구의 부모님은 나를 좋아하셨다.

그 집에 가면 어른들과 식탁을 함께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그곳에서처럼 실감된 적은 여태껏 없었다.


그들은 돈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돈으로 사람을 대접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면서도,

상대가 기쁘게 받아줌에 감사히 기뻐하는 태도.


그건 우아한 힘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재물에도 향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 향기 위에 쌓인 부는 정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쾌한 분이었다.

과묵했지만, 입을 열면 언제나 웃음이 따라왔다.

그 말에 먼저 웃던 아내는,

나이에 상관없이 ‘소녀’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분이었다.

나는 그 부부를 좋아했고,

그들도 나를 반겼다.


그런데, 바로 그 어머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거지근성이야. 도와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라움과 서늘한 충격 사이에서 멈칫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쩐지 이해되는 마음이 스쳤다.


이야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그 집에는 오래전 ‘유모 언니’가 있었다.

고아였지만,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고 했다.

그 가족은 그녀를 딸처럼 대했고,

웃게 했고, 공부를 시켰고, 결국 대학까지 보냈다.

지금은 은행장의 아내가 되어 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먼저 전하는 이유가 있다.

그 가족을 향해 쉽게 비난을 던지기엔,

그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 너무도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를 분노하게 만든 건, 한 직원이었다.

그는 반복해서 가불을 요청했다.

이유는 날마다 달랐다 —

죽어가는 사촌, 병든 어머니, 밀린 집세.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여러 번 도왔다.

며칠의 휴가, 여러 차례의 가불, 묵묵한 배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욕이었다.

“잘 태어난 복으로 대대로 잘 살면,

없는 사람 좀 도우며 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게 그렇게 당당해요?”


그 말에 담긴 억울함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의 형태로 다가오는 일은 드물다.


순간의 분노는,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며

그조차도 자기 합리로 바꾸어버린다.

‘거지근성’이라는 말,

그 속에 담긴 가진 자들의 마음을,

그때 나는 처음으로 들여다보았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아니, 틀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노력 없이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생존의 불안을 모른 채 보장된 안락 속에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마음껏 자라라.”

그렇게 격려받으며 자란 사람들.


그들이 받은 축복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들에게도 선을 베풀 때는 기준과 정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도 상처받았다.

가졌다는 이유로, 늘 먼저 의심받는 자의 서러움 속에서.


아마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끊임없는 편견과 시선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지근성’이라는 잔인한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유모 언니의 인생을 책임지고,

직원들을 일으키며,

내게 깊은 사랑과 감동을 보여준 바로 그 사람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