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이해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진 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인다"라고.
그 말은 결국,
가진 이들이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고
자기와 같은 무리만 허락한다는 뜻일 것이다.
팝송 가사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She’s out of my league.”
‘그녀는 내 레벨을 넘어선 사람이다’ —
감히 손이 닿지 않는 거리의 사람.
그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들만의 생활 철학이 되며,
거대한 우월감으로 쌓여
하나의 생존 방식이 된다.
하지만, 잠깐만.
한 번쯤 멈춰 생각해 보자.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똑같이 대하는 것 —
그것이야말로 개인의 존엄을
진짜로 인정하는 길이 아닐까.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말했다.
인간은 욕구의 계단을 오른다고.
그들은 이미 가장 기본적인 욕구,
집과 음식, 옷을 갖췄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금수저’라 불리는 그 소수도 결국 사람이다.
숫자는 적지만, 그래서 오히려
비금수저들과도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한 만남은 조금씩 삐걱이기 시작한다.
금수저가 건네는 물질적 호의를
비금수저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긴다.
“그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 돈 많은 이들도 사랑을 갈구한다.
그들의 호의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애정이다.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결국 같은 금수저를 찾는다.
금수저는 금수저의 외로움을 안다.
그들도 그 고독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채운다.
이제야 그들은 깨닫는다.
“같은 수준의 사람끼리 만나야 편하다.”
그 말이 더 이상 속물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걸.
내가 이런 역동과 순환을 이야기하면
아마 누군가는 나를 편협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나의 이 복잡한 생각은 그리도 이상한가.
어쩌면 그들도 다만,
살아남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금수저는 ‘항상 당연한 것을 받는다’는 오해 속에서.
무언가를 줄 수는 있어도 ‘감사받을 자격’은 없다는 단정 속에서.
자기 연민조차 사치처럼 보이는 억울함 속에서.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마음을 닫는다.
순수한 친절마저 특권의 훈계처럼 보일 것을 알기에.
해명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순간 변명으로 들릴 것을 알기에.
해명할수록 더 깊어지는 자격 논쟁의 수렁 속에서
그들은 입을 다문다.
그리고 말없이 웅크린다.
이제 ‘끼리끼리’라는 말은 현실이 된다.
원래 그랬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몰렸기 때문이다.
가끔씩 해명하고 싶어지는 입을 틀어막는다.
그들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포장이사를 했다.
내 삶을 남의 손에 통째로 맡겨야 하는, 가장 무방비한 순간이었다.
그날 집에 온 사람 중, 다수가 장애를 가진 이들이었다.
나는 ‘무섭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곧잘 고개를 드는 그 단어 말이다.
그들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걸, 나는 직감했다.
평생을 방어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짓는 얼굴.
굳게 다문 입, 팽팽히 조여진 표정,
움직일 듯 말 듯한 몸.
그것은 타인에 대한 적대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에 가까운 자세였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시선은 공구와 서랍, 먼지 낀 창틀 위를 불안하게 헤맸고,
머릿속은 텅 빈 깡통처럼 울렸다.
그때—
미미가 발로 내 다리를 긁었다.
언제나처럼, 미미는 나를 찾았다.
“안아줘.”
나는 미미를 번쩍 안아 올렸다.
작고 따뜻한 몸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건 그저, 내가 미미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본능의 애정.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직원 중 한 여성이 얼굴을 무너뜨렸다.
표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순식간에 풀릴 수 있다니.
묶어놓은 얼굴이 툭 풀렸다.
빙그레 웃음이 번져 올라왔다.
“이름이... 뭐예요?”
서툰 발음이었지만, 분명한 질문이었다.
나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미미요. 미미.”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미미를 안아도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는 그녀의 품에서 요란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미미는 아무나 다 좋아했다.
이윽고 그들이 다가왔다.
생명에 처음 손을 대는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내가 알던 누구보다도 부드럽고, 절실한 손끝이었다.
그 순간부터였을까.
그들의 온기가 조용히 내 쪽으로 흘러오기 시작했다.
대장 직원에게 혼이 나면서도,
돌아가는 길에 안방 전등을 찾아 건네준 그 손은—
그저 일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없이 건네는 다정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미미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아니면, 나의 무심한 진심이 문을 연 걸까.
포장이사는 끝났고,
남은 일은 나 혼자의 몫이었다.
하루 종일 고생한 미미는 내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강아지’라는 말보다 먼저, 그들은 미미를 통해 다가온 그들.
그들의 손끝에는 조심스러움과 따뜻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그 온기 속엔 내가 다 설명하지 못할,
복잡하고도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청와대의 강아지가 수많은 의미로 해석되듯,
그들에게 ‘강아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에게 강아지는,
닫혀 있던 마음을 여는 따뜻한 손이었을까.
그들은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그 결을 가늠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미미는,
그저 미미였다.
어떤 의미도 덧씌워지지 않은, 나의 미미.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말해주는,
이유 없는 선물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나도 안다.
가끔은 생각이 너무 멀리 가서 스스로 지칠 때가 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복잡함이야말로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니까.
어쩌면 당신은 궁금할지도 모른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부탁한다.
내 이야기를 잠시만, 그저 들어주길.
내 복잡한 생각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깊은 상처를 남기셨지만,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자각을 주셨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람.
나는 그분을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선,
모순된 감정을 함께 껴안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심리학 강의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성숙한 사람은 모호함을 받아들일 줄 안다.”
집에 돌아와, 나는 울었다.
바위는 바위라는 사실,
계란으로 아무리 두드려도 바위는 상처 나지 않는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언어를 붙잡았다.
그때 C.S. 루이스의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성숙한 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오래 남았다.
내 안의 무질서를 다독이는 단단한 위로였다.
당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냉정하고 분명하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던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모순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복잡함 속에서 길을 찾는다.
이성은 언제나 도망칠 길을 알려주지만,
본능은 사랑을 거두지 못한다.
그 구차한 모순의 경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의 복잡함을 끌어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탁상공론은 여전히 배부른 자의 것이라고.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가끔은 나 자신이 어이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고 싶다.
무지에서 출발한 한 줄기 의문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이집트어’를 잘하는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 일조차, 배우지 못한 채로.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말은 힘이다.
그 힘이 어떻게 작동하고,
누구에게 유리하며,
왜 그렇게 되어왔는지를,
우리는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 시작이다.
판단을 멈추고 질문을 품을 때,
비로소 이해는 문을 연다.
성경은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 마음으로,
나의 불완전한 고백 앞에 잠시 머물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