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알지 못하는 슬픔에 대하여
“The most exhausting thing for me is... hating you.”
(사실, 가장 지치는 건 당신을 싫어하는 일이에요.)
Grey’s Anatomy.
메레디스가 데릭을 향해 한 말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상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같은 병원 산부인과 과장이었다.
그를 싫어할 이유와 자격은 넘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구차하다.
사랑은 왜 때로 구차할까.
사랑은 구차하지만, 울고 있는 메레디스는 여전히 예뻤다.
드라마는 그런 것이다.
앞집 연주가 이런 일을 겪고 이런 말을 했다면,
이렇게 예쁠 수 있었을까.
세팅 속의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
눈이 슬프고, 턱살도 로맨틱하고,
돋보기마저 스타일리시한 그들의 세계 속에서는
지저분함이 인간적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화면이 어두워질 때,
나는 메레디스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독한 시아버지였다.
피아노 치는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셨던 시아버지는
한때 나를 예뻐하셨다.
그러나 삶이 당신의 자존심을 부서뜨려갈 때,
시아버지는 내 자존심도 함께 무너뜨려 가셨다.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예리한 고통이었다.
그런 아픔은,
어디에서도 겪은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겪을 필요가 없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낭비적이고, 거지 같으며, 구역질 나는,
경멸스러운 아픔이었다.
나는 그 경멸을 고스란히 마음에 품었다.
그 시아버지가, 이제 돌아가신 것이다.
카펫 위로 진공청소기를 밀다가 나는 울었다.
이 땅에 그 고약한 노인네가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파서였다.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검게 변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대단한 노인네가, 결국 굴복했구나.
플라스틱 호흡기 따위에.
바보 같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약해 빠진 노인네 같으니라고.
관 뚜껑을 봉합할 때,
아버님은 한 줌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동정이 아니다.
연민은 더더욱 아니다.
이건 잔정이다.
사람들은 순간의 진실이나,
잠깐의 연민을 잔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건 잔정이 맞다.
그런데도
이놈의 잔정은
왜 이토록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가.
이 짓누름은 나의 무지다.
죽음을 알 수 없는,
죽음의 경계로 넘어갈 수 없는
완전한 나의 무지가 나를 압도한다.
“죽은 자는 이미 죽었기에 죽일 수가 없었고,
죽어 널브러지고 문드러진 자세로 산 자를 조롱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영광에 침을 뱉고 있었다.”
—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시아버님은 아름다운 분이셨다.
당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이상이 그러했고,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우월이 그러하셨다.
터무니없는 우월감조차
아름답게 보이게 할 만큼,
그분은 강하고 단단한 분이셨다.
그러나 단단함은 언제나 가장 먼저 부서진다.
호흡기의 바람에 얼굴이 검게 변해가던 그날,
나는 알았다.
존엄이란 끝내 육체를 이기지 못하는 것임을.
그는 무너졌고,
그 무너짐 앞에서
나 또한 함께 작아졌다.
넘어갈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서
그분은 다시 호통치신다.
“나는 죽었기에 위대하다.
너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나는 운다.
가엾어서.
시아버님이, 너무 가엾어서.
난데없이, 나는 총총이 보고 싶었다.
“총총은 등에 짐을 싣고 요의 뒤를 따랐다.
총총은 머리를 숙여 요의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사람의 걸음이 너무 느리고, 사람의 짐이 너무 많아서
총총은 때때로 사람들이 가여웠다.”
—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총총.
나를, 그리고 아버님을 가엾게 여겨줘.
그 시선으로,
우리 존재의 무거움을 덜어줘.
연민도, 동정도 아닌 나의 애도를
총총은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이 글의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인간의 감정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