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왜곡 - 어디서 오는가
1.
“저… 저… 드응신. 저게 박사야. 저게.”
여자 앞에만 서면 꼭 헛소리를 하는 지호를 보며, 정민은 깊게 한숨을 쉰다.
겨우 소개팅을 엮어줘도, 지호는 늘 그 모양이다.
엉뚱한 말을 내뱉고 물을 쏟고 나온다.
불쌍한 녀석이다.
정민이 정신과 전공이라 그나마 이해하고 애정을 붙이지,
여자 앞에서 지호가 등신짓을 하는 걸 보면
다른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자는 예쁜 여자를 보면 뇌의 일부가 잠시 멈춘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다’기보다,
보상회로가 폭주하면서 다른 회로들이 순서를 잃는 거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매력적인 얼굴을 보는 순간,
주의와 판단,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이 미묘하게 둔해진다고.
그래서 남자들은 그 순간 이상한 말을 하고,
급기야 물을 쏟는다.
그 물은 손의 실수가 아니라, 마음의 과열이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약간의 뇌 손상처럼 보인다.
불행하게도 여자들은 모른다.
지호가 연구실에서 얼마나 진지한지,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그들 눈엔 지호가 그저 썰렁한 농담이나 던지는 사람일 뿐이다.
진짜로 박사인지 의심이 가는 얼간이.
정민은 답답하다.
따라다니며 설명해주고 싶다.
“이게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긴장하면 뇌의 한 부분이 과열돼요.
그래서 얘가 연애 쪽은 이렇게 멍청한 거예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저, 이 등신이 불쌍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이것은 지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
집에 오니 예린이가 시무룩하다.
예린이는 내 동생이다.
딸이라고, 특히 아버지가 예쁘다 예쁘다 하며 키우신 때문인지
예린이는 약간 이기적이지만 사랑스럽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애교와 결과가 조건반사처럼 연결되어 버렸다.
예린이에게 ‘사랑받는 방법’은 이미 학습된 행동이다.
예린이의 문제는 제법 심각했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동시통역대학원 스터디 팀에서
한 여성이 예린이를 계속 괴롭히는 것 같았다.
들어보니 가은이라는 여성이
예린이의 말과 행동을 유난히 아니꼽게 보는 눈치였다.
예린이가 울며 호소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들렸다.
내가 보기에도, 가은이 예린이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예린이가 “우리 집은 소파를 바꿔야 해.
강아지가 나이가 많아서 천 소파 위에 계속 오줌을 싸대서.”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강아지 얘기, 소파 얘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가은은 냉랭하게 자른다.
“그냥 천소파 사.”
사람들이 “강아지가 싼다잖아.” 하면
그제야 “아, 그래?” 하며 웃는다.
사람들에게는 나이스하지만,
예린이의 말만 유독 잘라버리는 식이다.
아버지가 주재원이셔서 우리는 뉴저지에서 5년을 살았다.
예린이는 초등학교를 미국에서 보냈다.
예린이의 영어가 훌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은은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예린이가 불공평한 특혜를 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린이가 무슨 말을 해도 삐딱하게 들은 것이다.
이건 뭐, 예린이 입장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통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예린이가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는다고 단정 짓는 것도,
세상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는 비꼼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예린이는 참아야 했다.
예린이야말로 대학 시절부터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세워온 아이였다.
그런데 가은은 꼭 남자들이 있을 때마다 예린이에게 말했다.
“얼굴에 뭐 했어? 어떻게 이렇게 환해졌어?”
“강아지가 속 썩여? 얼굴 옆선이 갑자기 V가 됐네?”
그 말들은 칭찬이 아니었다.
남자들 앞에서 예린이가 성형을 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교묘한 의심의 씨앗이었다.
여성이 여성의 ‘여성성’을 건드려 바보로 만들어간다.
그것도 지치지도 않고, 수차례나.
예린이는 어느 순간,
가은이 원하는 예린이로 살아야
이 일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은이가 불안이 많구나.”
내가 말했다.
“응. 응, 오빠.
지가 불안하니까 자꾸 나를 공격해.
나는 그런 줄 알고 더 나이스하게,
웬만하면 부딪히지 않으려고 했거든?
근데 걔는,
내가 아예 입을 다물고 스터디에서 혼자 침울하게 있기를 바라.
사람들이 나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보거나,
비호감으로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그런데 정작 문제는 더 심각했다.
둘이, 결국 맞붙어 싸웠다는 거다.
충분히 비꼼을 당했다고 느낀 그날,
예린이가 가은에게 대화를 요청했단다.
결과는?
예린이의 참패였다.
으이그…
내 주변 인간들은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물러터진 등신들일까.
자꾸 성형했느냐는 식으로 몰고 가니까, 힘들다.
그 말 하나 꺼내면서,
예린이는 벌써 손이 덜덜 떨리더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를 세 번이나 반복하는 가은 앞에서
예린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더란다.
목소리마저 떨렸지만,
예린이는 꺼낸 말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끝까지 말했다.
그날, 어디서, 어떻게 네가 그랬고
옆에 앉아 있던 시윤이도 그때 너한테 아니라 했고...
그제야 가은이 “아~” 하더란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예린이, 네가 얼굴이 환하고 기뻐 보여서
내 딴엔 칭찬한 건데, 그걸 그렇게 들었어?”
예린이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가은이는 힘을 얻은 듯 점점 크레셴도가 되어갔다.
"나는 너를 너무 좋아했는데,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요즘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해?
나는 지금 마음이…”
그녀는 신파조로 말을 잠시 멈췄다.
저런 걸 Drama queen이라고 하지.
예린이는 그때, 정말 가은이가 역겨웠단다.
“거짓말.
너 정말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못생긴 주제에,
돈 없다고 맨날 부모 탓이나 하고,
공부도 별로인 주제에.
앞가슴은 툭 튀어나와선,
그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새가슴이라고 해.
뭐?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서
살 좀 쪄보는 게 소원이라고?
야, 너처럼 다리가 짧은 체형은
마르기라도 해야 커버가 되거든?
나는 뭐, 입이 없어서 말 안 하는 줄 알아?”
예린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이렇게 다 뱉어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겠어, 오빠.
그전까진 가은이 못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땐 왜 그렇게 걔가 못생겨 보이냐.
진짜 얼굴만 보면 욕이 막 쏟아지더라.”
분노로 흥분하던 예린이가 갑자기 깔깔 웃었다.
오누이가 좋구나.
나도 괜히 속이 풀려, 따라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대충 짐작은 하면서 내가 물었다.
“뭐라고 해.
그랬냐고 했지.
역겨우니까, 짜증 나니까,
‘아~ 그랬구나~ 응~ 그렇구나~’ 했지.
거짓말이잖아. 너 대단하다.
와, 나 같은 건 너 앞에 서면
완전 생선처럼 발리겠다—이래?”
예린이가 다시 풀이 죽어 대답했다.
3.
배스킨라빈스는 써리 원이다.
요즘은 아이스크림 종류가 하도 많아서
도대체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들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배스킨라빈스는 31이 제일 정겹다.
속상할 때 우리 오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영화 속 수전 서랜든도 그랬고,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다.
예린이에게 피스타치오 아몬드와 체리쥬빌레를 건네며 말했다.
“어서 먹어, 어서.”
어릴 적 엄지공주만 하던 아이가
이젠 쭉 세로로 커져 내 앞에 앉아 있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그 모습을 보니—
가은이라는 애,
뛰어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너, 마이클 더글러스 나오는 Don’t Say a Word 기억나?”
“응. 오빠랑 몇 번이나 봤잖아.
마이클 더글러스가 딸 유괴당하고,
범인들이 정신병원에 있는 엘리자베스한테 가서
기억을 알아내라고 하잖아.”
“그래, 맞아. 그때 마이클 더글러스가 말했지.
‘Cognitive Distortion’, 인식의 왜곡이라고.”
“기억나지.
그때 나도 그 표현 처음 배웠는걸.”
“가은이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아마 자기 잘못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와서
잠깐 현실이 비틀렸을지도 몰라.”
예린이의 말을 들어보면,
가은이는 끊임없이 자신과 예린이를 비교한 것 같다.
사람들에게 밀릴까 봐 늘 불안한 상태였던 거다.
그럴 때 그녀는 선택적 추상화(Selective Abstraction),
즉 전체 맥락 중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부분만 과장해서 인식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린이의 말 중 “가죽 소파”라는 단어만 집어 왜곡하는 게 그 예다.
그리고 곧 투사(Projection)가 일어난다.
자신의 결핍과 불안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예린이는 잘난 척을 한다”, “불공평한 특혜를 받았다”는 생각은
결국 자기 안의 불안을 예린이에게 비춰본 거다.
마지막으로, 예린이가 불만을 표현하자
가은이는 합리화(Rationalization)를 한다.
자신의 공격을 ‘칭찬’으로 포장하며, 불안을 정당화한다.
“그건 네가 예뻐 보여서 한 말이야.
바로 그게, 왜곡된 방어의 언어야.”
“걔는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 같은 건 걔 앞에서 상대도 안 돼.
걘 완전히 단단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마음이 아플까, 그런 건 신경도 안 써.
냉정한 말을 빈틈을 노려서,
아주 빠르게 내지르지.
그거 못 당해, 오빠.
난 그냥 걔한테 찍힌 거야.”
“그래.
가은이는 겉으론 단단하지만, 속은 취약한 사람이야.
늘 불안할 거야.
자기가 이 그룹 안에서 제대로 어울리고 있는지,
그게 늘 마음을 갉아먹겠지.
그 불안을 통제하려고,
냉정함을 무기로 삼아버린 거야.
그건 쉽게 바뀌지 않아.
가은이는 앞으로도
냉소하고 조롱하면서 너와 거리를 둘 거야.
그걸 우월감으로 착각하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냉정함이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어야.”
“그럼 난 앞으로 어떻게 해?
시험공부는 같이 해야 하잖아.
그 스터디, 도움 된단 말이야.”
“그래, 그건 해야지.
근데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마음은 조금 옆으로 빼놔.
가은이랑 있을 때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필요한 만큼만 웃어.
관계에도 거리 두기가 있어야 숨을 쉬거든.
그리고…
가은이도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 거야.
그렇게 믿어보자.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이 들켰다고 느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냥 가은이에게 나이스하게 대해.
친구가 되려고 애쓰지는 말고.”
밤늦게 지호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면목없지만, 소개팅 다시 좀 이어 주라.
내가 너밖에 더 있냐?”
이 덜 떨어진 놈.
그 좋은 머리로 여자 앞에만 서면 버벅거리는,
사랑스러운 내 친구, 이놈.
푹 자고 나면,
우리 지호 소개해줄 예쁘고 착한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따뜻한 시선으로 지호의 사랑스러움을 알아봐 줄,
선물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