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싫어한 것은 결국 신이었다
오늘도 그 아주머니를 만났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코끝까지 당긴 채, 눈만 번쩍였다.
하고 싶은 말을 절제 없이 꾹꾹 눌러 담은 전도용지를 손에 쥔 채,
그녀는 그 종이를 내게 쑥 내밀었다. 거친 손길이었다.
“예수 믿으세요.”
짧고 단단한 말이 공기 중을 파고들었다.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서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스쳤다.
“아, 저 교회 다닙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구원받았다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숲 속 산책길 한가운데서, 이 여자는 온 얼굴을 다 가린 채 나를 지목했다.
왜 하필 나야.
내가 만만해 보이나.
‘키는 커다란 게 히죽히죽 잘 웃고 다니니 그래 보이지.’
예전에 친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회적 기술이 부족했던 거다.
그때 반응을 보였다니. 받아치지 말았어야 했다.
“네, 구원받았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방어였다.
차라리 그냥 “죄송해요, 당신 말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영어로 말해버렸다면 나았을 것이다.
‘구원받으셨나요?’ 하며 팔을 붙드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제일 잘 통하던데.
결의에 찬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녀의 몸이,
시작점을 울리며 팽팽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사탄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도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때부터였다.
물건을 팔면서 고객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친절 대신 충고를 건네며 자기 임무를 착각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르치는 자리에 서서 자기애도 지키고 밥그릇도 보호하려는 사람들.
자기의 역할을 넘어서 ‘올바름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들 말이다.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많다.
파는 사람은 물건을 팔면 되고,
가르치는 사람은 배움을 나누면 되고,
믿는 사람은 사랑을 전하면 될 일인데,
사람들은 종종 그 경계를 잊는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팔고 있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
마치 프레젠테이션 초반,
가볍게 웃기던 연설자가 돌연 정색하며 주제로 파고들 때처럼
나도 자세를 고쳐 세웠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아주머니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신가요?
저의 하나님은 다정한 분이시거든요.
저는 사탄이고 뭐고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요.
그분은 제 아버지이시고,
언젠가 나를 구원으로 이끄실 거라 믿어요.”
얼굴을 거의 다 가렸는데도 표정이 읽혔다.
툭, 매듭이 풀리듯 그녀의 얼굴이 아래로 흘렀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그녀는 다시 경계의 끈을 조였다.
“하나님은 다정하시기만 한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 가려던 나에게
그녀의 호통이 날아왔다.
나는 앞으로 세 걸음을 걸었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돌아섰다.
이 말을 해야 할까.
나에게 저 여성을 향한 애정이 있을까.
애정도 없이 굳이 이 말을 해야 할까.
“맞아요.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이시죠.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아…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 저 알아요.
그런데요, 아주머니는 왜 굳이 여기 나와서 하나님을 전하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아는 게 너무 많고, 하나님이랑 더 친하고,
선택받았기 때문인가요?
그 권리를 누가 주었는데요?
믿음이란 누군가를 시험하고 정죄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내면의 어두움을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잖아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게 뭔지 아세요?
사람들도 예수님 좋아해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바로 지금 아주머니 같은 사람의 태도예요.
자기가 위에 서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그 태도요.”
차라리 학위장을 들고 와서 강의를 시켜달라고 해라.
그게 훨씬 더 양심적이고 신사적이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마스크 속의 그녀가 갑자기 반쪽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내 염려였을까.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잠시 스쳤고,
곧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 아주머니, 혹시 이상한 종교 집단 사람이면 어떡하지?
나를 따라오면 어떡하지?
강아지를 안고 돌아오는 길엔
아주머니가 어떻게 나를 놔주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를 보호해 주세요.
제가 악한 말을 했다면 걸러주시고, 용서해 주세요.
주제넘은 제 말을 지워주세요.”
두려움을 기도로 이기려 웅얼거리며
나는 바쁘게 걸었다.
오랜만에 찾은 숲 속 산책길은 평화로웠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나무들이 참 좋았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강건한 나무들.
냄새를 맡느라 이곳저곳에서 멈추는 우리 강아지도
오랜만에 이 길이 무척 행복한 듯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가슴과 등에 ‘예수 믿으세요’를 써 붙인
그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손에는 쓰레기를 집을 수 있는 집게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나를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도 저랬을까.
솔직히 말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보호가 우선인 사람이다.
하지만 곧, 멍한 느낌이 뒤따랐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잠시 멎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아주머니가 나보다 백배는 훌륭하신 분이구나.’
거칠고 서툴고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아주머니는 깨닫고 행동하셨다.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커다란 용기를 보여주셨다.
나는 논리로 무장한 세련된 말로,
나의 분노를 엄숙하게 전달했었다.
믿음이 뭐?
자기 내면의 어둠이 뭐가 어떻다고?
이미 한참을 앞질러 가버린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감사함이 차올랐다.
감사해요, 아주머니.
저에게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셔서.
하나님의 크심을 알려주셔서.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안도를 느끼게 해 주셔서요.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반성보다,
믿을 수 있는 형태의 사람이
아직 이렇게 많이 살아가고 있다는 발견이 더 기뻤다.
그건 아직도 내가 너무 어린 아이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