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

30부

by 김대희

어긋났던 보폭을 맞추며


빠른 걸음으로 앞만 보며 걷는 게 습관이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혹은 뒤에 남겨진 것을

외면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늘 혼자였다.


그녀는 나를 따라잡기 위해 힘겹게 걷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내 옆에 따라붙어 걸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으며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혼자였다면 신경쓰지 않았을 골목길의 어느 집

창문너머의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모습이나,

길 모퉁이에 자리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그녀는 내게 시선을 멈추게 하는 여러 순간들을

보여주었고, 나는 조금씩 걷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편안한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녀가 조용히

말을 건냈다.

"무슨 일 있었지? 혼자만 끙끙 앓지 말아."

나는 묻지도 않고 다가와 안심하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사람 앞에서는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삶의 속도가 그녀의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종종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한동안 서로를 외면하다가도, 결국 먼저 손을 내밀어

"이번에도 내가 졌네"하고 웃어버린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함을

함께 채워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외로움은 이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그녀와 나란히 걷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의 속도와 방향을 존중하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와 나란히 서 있는 지금, 나는 마침내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발걸음은 그렇게 서로에게 맞춰져 간다.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시간


어떤 관계든 익숙해지는 순간, 그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낯선 시간이 지나고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지는 순간,

우리는 가장 깊은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때때로 가장 깊은 불안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관계가 주는 평온함에 기대어 긴장을

푸는 만큼, 우리는 그 평화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을 품게 된다.


관계의 안정 속에서 우리는 상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그 온전한 시선이 위로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선이 마치 투명한 벽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상대는 그저 변함없이 바라봐줄 뿐인데, 나는 그 안에서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이 감정은 상대가 변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얻은 안정에 스스로 너무 의존하게 된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외면하려 한다. 불안정했던 과거의

습관이 되살아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더 애쓰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내 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에 나만 아는 작은 틈을 만들어간다.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욕심이 결국 이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관계의 유연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관계 자체를

흔드는 아이러니.


관계는 그렇게 미묘한 균열을 겪으며 다시 엇갈리기

시작한다. 평화와 불안, 익숙함과 낯섦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파동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진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이 성숙해지는

방식일 것이다.



너도 그랬을까


내 마음에서 시작된 소란이 결국 우리 관계에 미묘한

간극을 만들었다. 불안함에 애쓰던 내가 그 노력을 멈추자, 그녀 역시 서서히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내가 겪었던 감정의 흔들림을

그녀도 짐작하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어쩌면 내가 애쓴다는 이유로 그녀의 마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건 아닐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실은 그녀의 몫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식된다. 함께 이야기하다 잠시 멈칫하는 그녀의 표정 속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망설임을 읽었고, 무심코 던진 내 말에 덧붙여 웃던 그녀가 이제는 그저 조용히 시선을 던진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나는 그 침묵에서 말로 옮겨지지 않는 어떤 변화를 읽어낸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답 없는 질문만을 남긴 채,

그저 그 간극을 확인하는 시간을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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