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부
그 때의 우리가 아니라서
어떤 관계든, 익숙함은 언젠가 낯선 무게로 다가온다.
한때는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이 오히려 관계의 끝을 예감하게 하는 서글픈
예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 끝은 상대방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관계를 지키려는 마음이 순수한 사랑이 아닌, 외로움을
피하려는 이기심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순간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모습 자체로도 가장 큰 위로를 받았지만, 어느 순간, 그 위로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그 불편함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고,
그 동안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 어떤 말보다 참 아프게 다가운 무언의 신호였다.
그렇게 관계가 아무것도 아닌게 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결국 상대를 지치게 하고,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과거에 했던 약속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한 가장 큰 기만이었고, 이별을 피하려던 노력마저 무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놓아버린 마음
놓아버렸다. 몸을 감싸던 영혼이 한 번에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내 몸을 지배하던 가식을 벗어던진 것처럼, 가벼움과 동시에 낯선 한기가 밀려왔다.
관계를 지키려던 노력이 나를 짓눌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슬픔이나 허무함이 아니라, 모든 감정이 사라진듯한 무덤덤함이다.
놓는다는 것은 결국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푸는 단순한 행위었지만, 그동안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직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들은 나의 머리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그녀와 나눈 소소한 추억들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취가 남았던 길도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기억도,
그 기억을 감쌌던 따뜻함도 사라져 버렸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를 놓아버린 마음은 그렇게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갔다.
마음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관계의 끝을 인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끝을 알면서도 머뭇거렸던 지난날의 모습과, 자신의 이기심을 직면하며 괴로워했던 시간으로부터 온전하게 해방되는 순간이다.
관계의 끝은 비극이 아니라, 스스로의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이제 홀로 걷는 길 위에서, 다시 나만의 템포를 맞춰 갈 것이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
연남동 거리를 걷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혼자의 공간이지만, 걸음마다 밟히는 추억들은 아직 낯설다.
겨울이면 손을 꼭 잡고 걷다 춥다고 내 품에 안기던 그녀의 체온, 사진을 찍어줄 때 세상 해맑게 웃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놓아버린 마음 속에서 이런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나는 무덤덤함과 뭉클함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인다.
사랑의 끝을 인정한 마음은 익숙한데, 가슴 한 켠은 아릿하다.
사랑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며, 그래서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나는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 나의 일상에는 그녀가 남긴 빈자리가 무수히 많다.
특히, 습관이 무섭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가 습관처럼 커피를 내리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 빈자리는 그녀가 가져다주던 따뜻한 커피와 사랑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처럼 선명하다.
그녀의 부재를 매일 확인하는 잔인한 시간 속에 나는 머물러 있다.
만약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내가 다시 만난다면, 나는 진심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와의 사랑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의 이기심 때문에 상처받았을 그녀에게, 더 이상 관계를 붙잡으려 하지 않은 나를 보여주며, 우리의 지나간 자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서로의 눈빛으로 확인하고 싶다.
가장 무책임했던 자신을 마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