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

32부

by 김대희

사랑의 새로운 정의


사랑은 종종 낭만과 열정이라는 틀에 갇힌다. 서로를 향한 맹목적인 헌신이나 영원할 것 같은 행복만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관계의 끝을 경험해 보면, 사랑은 단순히 상대에게 향하는 감정이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가장 솔직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 같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대를 향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아파한다.

상대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다른

존재였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끝을

통과해서야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재정의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관계가 끝난 후에도 그 시간을 온전히

기억하는데서 나온다.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며 이파하기 보다 그 사랑이 나에게 남긴 의미를 담담하게 곱씹어보는 것이다.

관계의 실패를 통해 가장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 경험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정표를 따라 홀로 걸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사랑하길


누군가 나에게 더는 아프지 않고 사랑하는 법이 있느냐

묻는다면, 이제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과거에는 사랑이 끝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영원할 것 같았고,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나온 마흔다섯 해의 시간을 돌아보니,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이 상실만이 아니었다.

한 번 식어버린 마음은 다시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 빈자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가

되어주었다.


사랑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뜨거운 감정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계에 얽매여 자신을 잃어갔던 시간, 상대의 관심이

멀어질까 불안해하며 붙잡고 있던 날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사랑을 하면서 놓쳤던 나

자신을. 그리고 나를 잠식했던 이기적인 감정을.


그래서 나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연들과, 수많은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배우며, 나 자신에게 좀 더 깊이 몰두한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하게 채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잃어버렸던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다.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며, 잊고 있던 감각들을 하나씩 꺼내본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빛깔과 온도를 보고 느껴본다.



모래시계


시간이 흐른다는 건 당연한 이치이지만, 어떤 시간들은

유독 빠르게 흘러간다. 뒤집힌 유리병 속 모래알처럼,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빠르게 쏟아져 내리는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맺은 인연을 붙잡고 싶어

했지만, 그건 이미 흘러가버린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관계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내 욕심만으로 채워진 모래시계는 결국 모래알을 다 쏟아낸다. 상대방에 대해 헌신인 줄 알았던 감정들이, 사실은 나를 잠식했던 오만과 불안이었다.

늘,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나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보다 내 손을 먼저 붙잡아주길 원했다.

흘러가버린 과거의 아픔을 인정하기보다 그 아픔을

반복하려 했고,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상대의 진짜 모습만 보려고 했다.

결국, 텅 빈 공간을 마주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흘러내린 모래가 바닥에 쌓였다. 그 위에서 나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다. 함께했던 순간들, 나의 불안으로 얼룩졌던 기억들, 결국 끝을 맞이한 관계까지.

이 모든 것이 한 줌의 모래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나는 그 모래를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지만,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어

새로운 시간을 흐르게 할 수 있다.

모래의 흔적을 되새기며, 새로운 관계를 담아낼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텅 빈 모래시계는 이제 나의 시간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나는 오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시간이 흘러 모든 모래가 떨어져도 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시 모래를 채운다.



작가의 이전글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