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부
한 사람을 사랑하면
너를 사랑하면서, 나는 네 삶이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곳에는 숨결마저 멎을 듯한 기적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채도가 낮은 슬픔의 계곡도 있었다.
네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멜로디와 어릴 적 즐겨 보던
빛바랜 사진들. 네가 지나온 모든 계절의 냄새들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너를 완성시킨 수많은 서사임을 알기에,
나는 너의 모든 것을 품고 싶었다.
불안한 눈빛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랑 앞에
늘 미안함을 안고 산다는 점이다. 네가 숨겨왔던 상처를
보았을 때, 나는 외로움의 무게를 짐작했다.
나의 상실이 남긴 차가움과 너의 아픔이 남긴 차가움이
만나,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관통했다.
나는 너의 아픔을 안아주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인생을 사랑하며, 나는 관계의 균형을
배웠다. 일방적인 채움이 아니라, 그녀의 빈 공간을
조심스럽게 마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은 온기가 만들어내는 안도감만으로도, 그녀는
내 세상의 중심을 온전히 잡아주었다.
나는 더 이상 외로움에 젖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걷는 인생이라는 여정.
나는 더 이상 앞서가지도 뒷걸음치지도 않는다.
너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남긴 흔적들을 모아,
우리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의 인생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으니까.
사랑을 주저하는 당신에게
사랑이 한 겨울의 강물처럼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차가움에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당신은 그 강물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차가운 강물이 아니라, 그 강물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봄날의 따뜻함.
또 한 번의 혹독한 겨울의 추위, 당신의 마음 한 구석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처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당신의 마음은 이미 끝나고 있다.
언젠가 사라질 관계의 온기, 다시 겪게 될지 모르는 시린 아픔을 미리 계산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내어주기엔 너무 많은 것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고 믿고 있는가.
그래서 남은 희망마저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신이 간직한 작은 초목이, 어쩌면 사랑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 초목은 완벽한 나무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당신의 황량한 황무지에 맺힐 작은 이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슬이 당신의 오래된 빗장을 녹이고,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한
걸음이 아니라, 그 작은 초목을 곧게 자라게 하려는 마음.
그저 한 번 더, 누군가의 진심을 믿어보는 것이다.
가장 긴 겨울이 끝난 후에
굳게 닫혔던 문이 서서히 열린다. 아주 오래된 문이라
녹슨 경첩이 삐걱일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메마른 들판에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닿은 탓일까.
차갑게 얼어붙었던 기억의 잔해가 녹아내린 자리에는
이제 푸른 싹들이 돋아난다.
그 작고 어린싹들은, 언젠가 푸른 숲을 이룰 거라는
기약 없는 약속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나는 더 이상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나 자신마저 놓아버리려 했던 순간들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살아갈 용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침묵으로 가득했을 때,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 막다른 길의 끝에서, 나는 무언가를 마주쳤다.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음에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이제 나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설렘을 느끼며 사랑 속을
걷는다. 그 설렘은 강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처럼, 조심스럽지만 견고하게 내 마음을
지탱한다.
그동안 멈춰 있었던 감각들이 깨어난다.
무심했던 공기에 향기가 배고, 쓸쓸함의 무감각함 대신,
선명한 감정의 울림이 드리운다. 이제 나는 관계의 깊이를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호흡에 맞춰 서로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시간을 보낸다.
걸음마다 흔들림이 남아도, 나는 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며 작은 행복들을 쌓아간다.
이제는 두려움 대신 너의 존재를 알아가는 이 시간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아름다운 여정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