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x편’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어쩌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잔인한 가정사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브런치를 지인에게 오픈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20대의 멘탈을 뒤흔들었던 가정사를 단지 팩트 중심으로 건조하게만 나열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에세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주관적 입장에서 말해보려 한다. 감정에 치우칠 수 있다는 글이라는 것을 미리 양해 구한다.
다음날 출근을 하면서 왠지 모를 절망감이 느껴졌다. 어젯밤의 상황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호흡은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일하는 내내 머릿속이 계속 딴생각으로 맴돌았다. 도저히 이대로는 직장에서 버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주를 고비로 결국 퇴사를 통보했다. 입사계약서를 쓴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같이 들어온 동생은 지문인식 등록 절차를 거치며 이제 물류팀의 가족으로 인정받았다. 나는 가벼운 책임의 달콤함이라는 마약에 빠져 또다시 무작정 도망치고 말았다.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나가라 하면 나가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말도 안 되는 무기력으로 토요일을 날려 보냈다. 다음 날이 돼서도 수면시간은 저만치 늘어나 내 의지를 비틀고 있었다. 그냥 글로 써서 엄마에게 전달할까? 그래도 다시 한번 대화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삭히면 잊히겠거니 하는 마음에 며칠을 버텨봤는데 속마음만 썩어 문드러졌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저녁에 엄마와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이야기하려던 시간에 맞춰 셋째 누나가 놀러 왔다. 차라리 나는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한 때 우리와 같이 살기도 했으니 나는 누나에게도 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와 누나를 앉히고 나는 그날 가졌던 대화에서 내가 느꼈던 서운함이 무엇인지 말하기 시작했다. 단지 술을 줄이라는 이야기보단 늦게까지 마셔야 했던 이유를 언급하지 않은 점과 대출금에 대해 걱정을 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동안의 노력을 무시해 온 것처럼 말한 부분을 꼬집었다. 더불어 이 집에 대한 빚을 얼른 갚고 나서 조금 더 내가 설계하고 싶은 인생대로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부분인지도 물었다. 나는 응원해주지 못할 바에야 그냥 지켜만 봐달라고 만이라도 말했다.
처음에 중재를 해줄 것처럼 이야기했던 누나는 내가 퇴사통보를 했다고 하니까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말했던 이유는 모두 다 같잖은 변명뿐이고 핑계에 불과하다고 대꾸했다. 누나와 엄마가 가세한 언어의 화력은 대단했다.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고 늘 그렇듯 현실의, 현실에 의해, 현실만을 위한 팩트 폭행 앞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나로 인해 피해받은 것도 없으면서 왜 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까지 바닥인지에 대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엄마와 누나는 내가 그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제 밥벌이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는 내가 불쌍하다는 이야기만 늘어놨다. 결국은 남들도 다 느끼는 그런 흔한 전개였다. 잔소리로 들었다면 무난하게 넘어갔을 말들이었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된 것은 대화가 지금은 진지한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내가 외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부담을 내내 고려해가며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을 설계해보겠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내 삶이고,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 그것까지 가족의 뜻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내 입장이 이러한데 그렇다면 엄마와 누나도 내가 설계하려는 삶을 존중해주려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막 살아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직은 책임이 크지 않은 위치에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막중한 부담을 느끼면서 살 필요는 없고 때에 따라 책임지는 위치에 있을 때 그때 가서 맡은 바 역할을 해도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그런 선례를 만들어 놓지 않았는데 무엇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 나는 참 많이 서운했다.
하지만 치열한 난파전이 예상되었던 대화는 이번에도 일찍 끝났다. 누나가 내뱉었던 언어 폭력에 나는 다시 맞서 일어서기를 그냥 포기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