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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 1편

by Aroana

이 내용을 자세히 밝힌 이유는 서른두 살, 그간의 모든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 사실상 마지막 사건이라 서다. 어떻게 보면 찌질해보이고 창피한 기록이지만 스스로에게는 어찌되었든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대로 산다’에서 호주의 한인 동생 매니저에게 당했던 치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가 느낀 아픔을 가감 없이 표현해 보기로 했다. 너무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때는 당시 마음에 두었던 그녀 집에 초대받아 갔을 무렵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동생과 (나와는 일면식이 없는) 그녀의 친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조금은 어리둥절해하며 앉아 있었는데 동생이 그녀와 함께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친구와 어색한 자기소개를 하며 상황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온몸으로 마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고는 잠시, 그녀의 친구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둘 사이를 바라보며 이 모든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한 마디를 내게 건넸다.


“그나저나 저 커플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아요?”

“네?”


삶에서 겪은 가장 비참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K였고 동생은 A였다. 이 둘은 모두 캐주얼 바에서 알게 된 동생들이었다. 처음에는 A를 먼저 알았다. 그는 내가 바에 들어오고 나서 한 달 뒤에 그만둔 쾌활하면서도 일을 잘하는 동생이었다. 반면 K는 내가 일하고 7~8개월 뒤에 들어온 알바생이었다. 그녀는 내가 쉬는 날 교대로 일을 했으며 본업이 따로 있는 직장인이었다. K를 좋아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껴본 것 자체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근 3~4년은 인생의 물음에 답을 구하던 과정이라 이성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애세포는 건조하다 못해 사막화가 되었고 이성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조차 모를 때였다.


K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 나는 한창 에세이에 영상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2주 동안 그녀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기까지도 나는 K에게 마음 갖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쉴 때 그녀가 일을 해서 시간이 겹칠 일도 없었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더욱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공통점이 한 개 있었으니, 그것은 둘 다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K에게 인수인계를 마치며 같이 야간을 잘 이끌어보자는 말로 끝나고 술을 한 잔 권했다. 그렇게 약간의 친분이 쌓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묻지 않은 채 서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처음 한동안은 그녀와 나 사이에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종종 야간 업무에 대해 물어오는 것 말고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 K가 조금씩 내가 일하는 바에 종종 놀러와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다.


한가한 시간에 그녀가 놀러오면 나는 서비스 안주를 제공하며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대화를 하다 갑작스럽게 손님이 몰려오면 K는 내 일손을 도와가며 같이 손님을 맞이해 주었다.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내 연애세포가 조금씩 움찔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K 덕분에 쉬는 날,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가게에 처음으로 들러보기도 해봤다. 일부로 친구와 근처에서 약속을 잡아 헤어진 뒤 가게에 놀러가 그녀가 마감할 때까지 기다리며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분명 나는 K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런 내 마음을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이유는 남친도 있고 솔직히는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그저 술 한 잔 마시면 즐거웠고 내 대답에 호응을 잘 해줘서 그랬는지 편하게만 느껴졌다. 또 다른 친한 동생에게 K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호감을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을 때도 계속 거절했다. 명목은 친한 오빠 동생 사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솔직히는... 맞았다. 사실은 이성적으로 접근할 자신감이 부족했다


같이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에 K와 나는 꽤 많이 친해졌다. 우리는 장난도 곧잘 주고받았고 동료 중에서도 K와 가장 어울렸다. 우리는 가게에 대한 적나라한 호박씨를 까면서도 가끔은 미래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도 나눴다. 나는 네 살이나 어리지만 K의 당차고 활달한 모습을 좋아했다. 특히 무엇보다 투잡을 하면서도 불만을 갖지 않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와중에 나는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지면서 가게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 사이에서는 전환기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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