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마트 캐셔로 일한다는 것

by Aroana

기자를 그만두고 한 달이 흘렀다. 3억이라는 무거운 짐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기에 마냥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약 2주일간의 재정비 시간을 가지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글을 쓸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일자리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시작한 일은 어느 배달 전문점의 조리사였다. 무조건 집 근처를 벗어나지 말자는 고집, 최저시급 이상은 받을 수 있는 자리, 풀타임 노동시간이 가능한 곳. 그렇게 전혀 생뚱맞은 조리사로서의 첫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는... 바로 런을(물론 제대로 이야기하고) 쳤다.


또 한 번 배움의 시간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단순하다고 뭐든 막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만 쌓여 갔다. 그러다 채용 사이트에 마트의 야간 캐셔 자리가 나왔다. 급여 조건도 나쁘지 않고 자전거로 출퇴근하기에도 괜찮은 거리였다. 과감하게 지원해 합격. 현재는 만 4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기자 때부터 면접을 볼 때 꼭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부끄럽지만)어쨌든 ‘작가’라는 것을 밝히고 글을 쓰기 위한 생계 활동이 필요해서 지원했다고 솔직히 말한다. 남들에겐 수입으로 인정을 받진 못할지언정 스스로에게는 최소한의 자존심(열정)은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서다. 마트에서 면접을 볼 때도 이렇게 말했고 다행히 사장님이 내 인상을 좋게 봐주셨다. 지금은 내 모든 책을 구입하며(소장용 책인 ‘생각대로 산다’도 구매해주셨다) 가치관을 존중해 주었고 나 역시 과거 알바로서의 자세가 아닌, 책임감 있게 도와드릴 거 도와가며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캐주얼 바를 그만두며 야간 알바는 앞으로 절대 안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야간 일’로 돌아왔다. 이제는 주간보다 야간에 일을 더 많이 했을 정도로 야간에 특화된 체질이 되었다. 정말 살면서 내 운명이 이렇게 아이러니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대로 산다’에서 삶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봤고 내가 이런 삶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 같다.


처음 마트에 야간 캐셔로 일을 할 때는 당연히 가족에게 내 일을 모두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알릴 필요도 없었고 그냥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이야기했다. 과거의 상처에서 아물지 않았기에 내 길을 내가 개척할 거고 결과물로 보여 줄 건데 왜 알려 하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다행힌 건, 가족들이 내가 큰 사고를 치지 않고 경제 활동을 하고 있으니 내가 하는 모든 활동에서 직접 물으려 하진 않았다. 그냥 일을 하겠거니, 관심 갖지 말자는 식으로 대했고 나 역시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족과 평범하게 잘 지냈다. 처음으로 누나와 매형, 부모님이 내 결정을 지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내 말에 힘이 실리는 인상을 받았다. 현재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투잡까지 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다. 물론 더는 대놓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누구보다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내 에세이까지 세상에 나왔으니, 생계와 본업에서 최선을 다한 삶으로 비치고 있다.


물론 간혹 살다 보면 어두운 그림자를 밟을 때도 있다. 가족에게는 이처럼 당당할지언정 어떤 모임을 가질 때, 누군가에게 내 소개를 해야 할 때면 여전히 내 표현이 쭈뼛쭈뼛해한다. 작가를 내세울 때면 늘 부끄럽고 마트에서 그냥 일을 한다고 소개하면 으레 마트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쯤으로 여기지, 캐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럴 때 오는 현타가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어색하다. 조금만 속마음을 알아차려 주면 내 결정이 말이 되는 행동이고 직업 외 다른 모든 활동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오히려 뛰어난 성과를 얻었음에도 자기소개에서 직업을 이길 수는 없는 것 같다. 뭐 당연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 직업이라는 게 내 나이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장 민감한 게 사실인 것 같다. 정말 오죽했으면 나 역시 그런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기자로 불렸을 때는 내 소개를 하는 게 너무 편했는데 지금은 무슨 부연 설명을 그렇게 많이 해야 한다. 조금은 안타깝고 아쉬운 현실이다.


가장 잔인하면서도 또 가장 책임감을 느끼는 게 있다면 “내가 선택한 삶인데...” 라는 말이 다. 맞다. 내가 선택한 삶이라서 힘들 때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좋게 위로해 줄 사람 없고 나약해질 때는 가슴에서 반드시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 밀려온다. 요즘은 이렇게 우울한 감정이 밀려올 때 시를 쓴다. 외로운 감정을 또 한 번 언어로 표현해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언젠간 나중에 내 이름으로 된 시집도 내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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