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오소년 Jul 15. 2023

깻잎머리(상)

밤새 열이 나는 작은아이를 깨워 병원 갈 채비를 서둘렀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생리가 터졌고, 수일 째 이어진 장마는 단단한 하늘을 물러터진 홍시로 둔갑시켰다. 간밤에 여자는 짙은 검은빛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등 뒤로 산소통이 없다는 걸 눈치챘을 때 아이의 젖은 기침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병원은 9시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아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루프로 앞머리를 말아 올리고 푹 꺼진 뺨에 생기를 부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한 달에 한번 동네여자들과 만남의 축포를 쏘아 올리기로 한 게 하필이면 오늘이다. 굵은 빗줄기는 아스팔트를 뚫을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아이보다 앞장서 겅중겅중 뛰었다. 대기표를 뽑기 위해 건물을 막 들어서는데 편의점 앞에 회색무리들이 진을치고 있었다. 등교시간이 임박했음에도 파라솔에 앉은녀석들의 젓가락질에는 여유가 넘쳤다.


‘암만, 비 오는 날은 라면이지.’ 덕분에 아침 메뉴 고민이 단박에 해결되었다.


월요일 아침 소아과는 맛집이 따로 없다. “예약은 따로없고요, 오시는 순서대로 봐 드려요. 지금 오시면 2시간 예상하셔야 해요.” 전화벨이 끊기기 직전에야 데스크 직원이 힘겹게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새벽부터 서두른 덕에 대기번호 6번을 받았다. 그녀는 진료실에들어가기 직전까지 빠르게 늘어나는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순번 34, 35, 36…. 동시에 여자는 비록 아이는 아프지만, ‘소아과 오픈런’에 성공한 엄마로서의 자긍심이 두 뼘쯤 커졌다.


30여분 만에 비는 잠시 소강상태다. 편의점 앞에 서 있던 회색 무리는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서 있는 두 명과 앉아 있는 세 명. 좀 전까지 화끈하게 면발을 말아 넣던 세 놈들은 다리를 꼰 채 핸드폰 삼매경에 이르렀다. 테이블에는 벌겋게 물이든 컵라면 용기와 핫바 껍질, 아이스크림 막대가 허물처럼 벗겨져 있었다. 우산을 펼치다 줄곧 먹방을 관람만 하던 회색 1이 시야에 들어왔다. 찰싹 달라붙은 어정쩡한 앞머리, 습기가 차오른 안경을 낀 아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쳐다본다고 답은 없을 텐데, 어정쩡한 자세로 손목에 찬 전자시계만 내려다보았다. 무리에 낀 것은 자의일까 타의일까. 여자는 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꼬깃꼬깃 접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븅신! 당장 거기서 나와.'








지루한 장마와 회색구름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그해여름, 소녀는 몹시도 궁금해하던 아니 어쩌면 재빨리 나이 먹고자 기다리던 생리와 마주했다. 뭉개진 구름에선 물 냄새 대신 비릿한 피 냄새가 흘렀다.


정부에서 교복 물려주기 운동을 장려했다. 얼핏 모양은 같지만 선명도와 천의 질감, 무엇보다 '맵시'의 유무에서 확연히 갈렸다. 본래 하복 블라우스는 하얀색이지만, 소녀가 받은 것은 두 장다 어정쩡한 상아색에 금빛 단추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치마는 또 다리미질을 얼마나 했는지 받을 때부터 엉덩이가 반짝거렸다. 깻잎머리에 무릎 위로 한 뼘이나 올라간 치마를 입은 아이들 옆을 지날 때 소녀는 자신의 통 넓은 월남치마가 여간 신경쓰였다.




그리고 깻잎 무리에는 곽과 장이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별공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