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사회의 서막을 중학교 2학년에 경험했다.
<수준별 교육제도>는 한 반에 50명 학생들의 수학 점수로 등수를 매겨 반을 나누게 했다. 때문에 일주일 세 번 수학시간에는 학생 대이동이 일어났다. 소녀는 OMR카드에 3번으로 기둥을 세우고, 주관식 문항에는 ‘0’으로 도배하는 것이 세상에지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열반에 들어간 순간 진정으로 열등해졌다.
열반 수학선생님은 활기찬 야시장 같은 사람이었다. 수학공식에 억지스러운 운율을 입히고,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몸짓으로 분필을 부러뜨렸다. 또 어느 날에는 ‘수학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괴상한 말을 잘도 지어냈다.
하지만 소녀에게 있어 수학이란 과목은 변방의 언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녀가 배우고자 했던 건 정연한 논리나 날카로운 통찰이 아니었다. 그녀는 삶에 ‘방법’ 들이 궁금했다. 이를테면 ‘친구를 사귀는 방법’,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방법’, ‘분노와 슬픔을 견디는 방법’, ‘행복해지는 방법’ 따위가 그것이었다.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서 공생을 가장한 생존을 익히고, 경쟁과 낙오, 방황과 반항을 끝없이 견뎌 내야 하는 시간. 바야흐로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소녀는 일찍이 평균 체중을 가뿐히 넘기고 비만인 대열에 들어섰다. 외모를 자각한 순간부터는 거울 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6학년 졸업식과 함께 이사 온 소녀는 친구 관계 맺기가 애달팠다. 학기 초마다 조급하게 단짝이 될만한 아이를 물색하고, 애잔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체육시간에 주어지는 자유시간이 난감했고, 쉬는 시간에는 소녀의 자리에 다른 아이가 앉아있으면 돌연 말끔히 정돈된 사물함을 열어 보았다.
은따였다.
“ㅇㅇ야 자리 좀 바꿔줄래?”
곽이었다. 아침마다 스프레이로 정성스럽게 깻잎을 만들어오는 곽의 입에서 소녀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곽은 깻잎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였다. 그녀의 큰 키와 시원하게 뻗은 광배근은 영락없는 여전사로 보였다. 열반으로 배정된 날, 깻잎 무리 대다수가 열반에 모인 걸 확인한 소녀의 입에서는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곽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지?’
소녀의 어깨 위로 곽의 긴 팔이 쑤욱 올라왔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곽과 눈이 마주치자 심박수가 수직 상승했다.
"ㅇㅇ야 펜 좀 빌려줄래?"
곽은 동사무소 직원마냥 일주일에 3번 만나는 소녀의 필통 속사정까지 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이어리 덕후였던 소녀의 유일한 낙이 할머니에게 받은 용돈으로 몰래 사모으는 하이테크펜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소녀는 수학시간이 끝날 때까지 돌려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음날 등교해서야 펜심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하이테크를 필통에 주워 담았다.
장이 좋았다.
수학시간에 장과 짝꿍이 된 건 단순히 성이 같았기 때문이다. 밀가루처럼 하얀 얼굴에 얇게 민 눈썹과 키티 손거울이 만화 속 캐릭터 같았다. 곽과 달리 장이 먼저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하거나 소녀에게 경우 없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다.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쪽지도 주고받고 신간 만화책 이야기도 공유했다. 둘만 있을 때 장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곽이 수학수업에 빠진 날 소녀는 장에게 '넌 어쩌다가 깻잎이 되었니?'라는 질문을 할 뻔했다.
열반 수학선생님의 활달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지가없는 아이들을 겨우 자리에 앉히고, 교과서를 꺼내라는 잔소리를 하는데 10분을 잡아먹었다. 어느 날부터는 칠판 가득 수학 문제를 내고 스스로에게 풀이와 증명을 해 보였다. 소녀는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걸어가는 선생님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속삭이며 하이테크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날은 장의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러 깻잎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3 분단에서 1 분단까지 돌고 돌아 착석한 곳이 착한 사마리아인 장의 앞자리였다. 필기에 몰두하던 소녀의 등줄기가 싸했다.
간질간질한 게 혹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