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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Aug 09. 2023

깻잎머리(하)

한바탕 비를 뿌리던 하늘에 멋쩍은 해가 고개를 디밀었다. 말쑥해진 하늘을 올려다본 여자는 ‘공원이라도 걸어야 살겠다’며 아이를 부추긴다. 들꽃 하나에도 생명의 존귀를 '가정교육' 했던 터라 집 없는 달팽이와 눈 없는 지렁이 전술이 제대로 먹혔다. 아픈 아이에겐 충분한 휴식이, 소란한 여자의 마음에는 수양이 답이리라. 우산 똑딱이를 닫고 약봉투를 에코백에 욱여넣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이러다가 또 언제 비를 만날지 모른다. 훌러덩 마스크까지 내던지고 나니 하룻밤 사이 누렇게 시든 여자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가려움이 이어졌다. 어깨를 들썩여 보고 등 뒤로 손을 가져다 대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내 가려움은 사라졌지만 수업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위기를 감지한 순간부터 감각세포가 촉수를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7월. 비를 맞아 마구잡이 솟아난 잡초의 생명력만큼이나 힘찬 송충이의 몸짓은 월요일 아침의 국민체조 같았다. 잠시 주춤하던 녀석이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검정이 마디마디 섞인 녀석의 뻣뻣한 털이 블라우스 위를 유유히 활보하게 놔둘 순 없었다. 소녀는 문득 필기를 멈추고 힐끗 고개를 돌렸다.


펜이 들린 손이 등짝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장이었다.


장의 동그란 눈과 마주치자, 소녀를 향해 분홍색 혀를 쏙 내밀고 겸언쩍게 웃어 보였다.

하마터면 소녀는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숫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받았다. 교복을 담그고 손으로 휘휘 저어 구정물이 나오길 속절없이 기다렸다.


소녀는 장을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열반 짝꿍이 되고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애초에 친구였던 것처럼. 숫기가 없는 장은 명랑한 장이 부러웠다. 외모와 달리 털털한 성품에 주변에 늘 사람으로 둘러싸인 그 애 옆에 있으면 뭐랄까. 자신의 지질한 모습이 가려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새엄마 이야기를 고백했던 날 밤새 펑펑 울었다던 장의 답장을 받고 결심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녀와 친구가 되기로.




운동화 솔에 빨랫비누를 묻히고 송충이의 흔적을 벅벅 문질렀다. 대야에 비눗물이 점차 뿌옇게 흐려졌다.

소녀는 하도 울어 딸꾹질이 멋질 않았다.


‘나는 네가 친구였는데...

너한테 나는 그저 괜찮은 도화지였구나’








다음날, 승차권 두 장으로 학교 말고는 갈 곳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며 장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화장실 한번 못 가고 점심시간이 왔다. 허기가 졌지만 도시락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지킬 자존심은 없지만, 보잘것없는 시위로 소녀는 스스로를 달랬다.


어째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

-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 친구를 잃는다는 것

그 애에게 나는 친구이긴 했을까?

- …



만화책을 끼고 등나무 벤치로 나왔다. 초록잎 무성한 나무아래에 깔깔 거리며 웃고 있는 깻잎무리가 보였다 그대로 돌아서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방으로 폴짝폴짝 뛰는 깻잎들의 난리통속에 장이 보였다. 장의 커다란 눈알이 겁에 질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던 무리의 흰 교복위로 송충이가 떨어진 것이다. 소녀는 기다란 줄을 따라 그네놀이에 한창이었을 송충이를 생태전문가 마냥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설익은 여드름 같았던 소녀의 사춘기는 그렇게 가버렸다.








해가 떴다.

여자는 말없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오래도록 눈에 담는다. 여름 볕이 뜨끈하게 여자의 뒷목을 달구는데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집 없는 달팽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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