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당신 마음이 정 그러면, 어머님 집으로 모셔와. 나 신경 안 써도 돼.”
아주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거절할 명분 역시 없었다. 2남 2녀 중 장남인 남편을 제외한 형제자매들은 죄 맞벌이 가정이었다. J는 지난 10년, 짧은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직장을 다닌 적이 없다. 아이는 엄마 손에 커야 한다는 책무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사회로 진격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의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고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달까. 아이를 좋아하진 않지만 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가족에게 밥을 해 먹이고 함께 책을 읽는 사사로운 일상이 가진 위대함을 일찍이 깨달은 것도 전업주부로 살아온 이유 중 하나다. 아침이면 진하게 내린 커피를 보온병에 옮겨 담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빗소리를 배경 삼아 소설책 한 권에 푹 빠져 눈시울을 붉히던 날이었다.
J의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차! 이틀 전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가신 시어머니를 잠시 잊었다. 지난 주말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난다는 어머님을 모시고 동네병원에 찾았을 때까지만 해도 여름철 곧잘 일어나는 저혈당 증상이라고 했다. 수액이라도 놔주려나 기대했건만 의사는 진료비도 받지 않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J는 슈퍼에 들러 연두색 색소가 그득한 청포도 맛 사탕을 두 봉지 샀다.
40년째 당뇨환자로 살고 있는 어머님의 무수한 통증과 아픔은 어느덧 집안에 부유하고 있는 공기 같았다. 어머님이 오래 당뇨를 앓아왔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더라. 어쩌면 결혼 전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언질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설령 알았다 한들 당시에 J는 무릇 다른 예비신부들 마냥 사랑하는 남자와 새 가정을 꾸릴 생각에 들떠 시어머님의 병색을 살필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한 달에 한번 ‘달거리’를 마주하듯 어머님을 뵈었다. 이번 달은 머리가 어지럽고, 다음 달엔 어깨가 결리고, 무릎이, 팔다리가. 근육과 관절 마디마디가 돌아가면서 어머님을 괴롭혔다. 아프다고 입만 벙긋했다 하면 당뇨 합병증으로 명명하는 자식들에게 서운하셨는지 J를 불러다 놓고 ‘아이고 자식들 키워봐야 하나 소용없다’는 말씀을 더러 하셨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어느 날인가 J는 어머님께 속엣말을 해 버렸다.
“어머님, 나이 들면 다 아파요. 저희 엄마도 아파요.”
꿈이니 망정이었다.
J의 가족이 시댁을 다녀간 며칠 뒤였다. 저녁상을 물리던 어머님이 갑자기 까무러지셨고, 먹다 남긴 오이냉국이 깻잎장아찌 국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나자빠진 어머님보다 더 놀란 아버님은 구급차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