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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Sep 01. 2023

며느라기

제2화.

Y는 숨 막히게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하늘을 찌르는 듯한 매미소리 아래 동무들과 멱을 감던 다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여름날이었다. 멀찍이서 아버지가다급히 자신을 찾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뒤통수로 날아드는 수군거림은 열두 살 소년을 더없이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쟤네 아버지 말더듬이잖여.”

고요하기만 아버지의 적막이 사실은 당신이 낸 소리에 쏟아지는 무례한 태도와 냉담한 시선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부정할 수 없는 결핍이었다. 그날 소년은 눈물을 쏟는 대신 벌게진 웃통을 그대로 드러낸 채 한참을 냇가에 서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년에게는 믿을만한 울타리가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의 삶은 본보기였고 권면인 동시에 어린 소년을 ‘이른 어른’이 되게 만들었다. 엄마는 눈뜨기무섭게 논과 밭을 떠돌다 해 질 녘에나 들어와 밥상을 차렸다. 땀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몸뚱이를 겨우 눕힐라치면, 말귀 어두운 남편이 벌여놓은 크고 작은 사고의 뒷수습이 기다렸다. 작은 초가집은 동네 사람들의 부당한 요구에도 떳떳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말발이 더해 번번이 속고, 사기당하고, 망해갔다. 엄마는 ‘입말이 거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게 분명하다. 입에서 쏟아내는 욕지거리와 모진 말투만이 엄마를 제정신으로 살게 했다. 거칠고 사나운 그러나 고되고 정겨운 여자가 바로 Y가 기억하는 엄마였다.     


Y는 어떠했을까?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청춘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때도 그의 마음속엔 항상 칠순 넘은 늙은이가 살고 있었다. 애써 살아봐야 덧없는 인생이라 단정 지으며...     


그랬던 그도 다정한 사람이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방에 남겨 뒀었나 보다. 내 엄마와는 달리 말씨에서 지혜가 교양이 묻어나는 여자에 대한 욕망을 은연중에 품게 되었다.      



         





‘너를 만나고 내가 살아온 31년이 참으로 무의미했음을 깨달았어.’

재기 발랄한 여자친구를 만나 일생일대의 연애를 하던시기.  Y가 날밤을 새 가며 적은 카드를 읽은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양주 염주알 굴리는 소리 하고 있네.”

Y는 J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매달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을 두고 한 번도 아내와 얼굴을 붉혀본 적이 없었다. 도시에서 자라온 아내는 시댁 가는 게 여행 같다고 말했다. 달리는 도로에서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지수가 상승하는 여자. 아이들이 차례로 태어난 이후에도 휴게소에 들러 간식 하나씩 집어주면 그만이었다.

친구들은 Y에게 ‘장가 잘 간 놈’이란 소리를 해댔다.




날마다 행복했다 불행했다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아내, 어려운 수학문제도 척척 풀어내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큰아들, 비록 아내를 닮아 머리가 좋진 않지만 심성 하나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둘째를 바라보면서 인생은 한 번쯤 살아 볼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난소암 3기 소견입니다.”      


어쩌면 엄마가 응급차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직감 했던 것도 같다. 왠지 이 행복이 증발해 버릴 것만 같은.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을 위해 김치를 담고, 가끔 보는 손주들 재롱에 깔깔대며 웃는 엄마의 마지막 여정이 병실이 될까 봐 Y는 두려웠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라면 나를 정말 걱정해 주고 이해해 주리라.     


“여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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