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J는 언젠가부터 주말연속극을 보지 않게 되었다. 신파에 신파가 덧입혀진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가 좋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주인공의 다음 대사가 점쳐질 만큼 진부한 결말임에도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따스한 인류애를 찬양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뜬금없는 건강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주인공에빙의 되어 돌아올 주말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면 어김없는 암 진단이 내려져 있었다. ‘내 저럴 줄 알았어. 죽여야 끝나지’ 저자극 티슈로 팽팽 코를 풀며 콧구멍의 개방감을 한껏 느끼던 그녀는 돌연히 한국방송작가협회에 화가 치밀었다. 멀쩡한 주인공을 하루아침에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머리에 두건을 씌우는 것에 쏟은 자신의 눈물 한 대접을 자책하면서...
“어머님이 암이라고. 진짜야? 진료차트가 뒤바뀌거나 아주 가끔 담당의사가 오진하기도 하던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J는 남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이어갔다. 난소암 3기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방황했다. ‘암’을말하는 남편의 건조한 말투가 사뭇 ‘감기’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암에 걸린 주인공을 보아왔지만, 정작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암에 걸릴 거라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담담하게 말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냥 운이 나빠서 걸린 거야. 지금 이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데. 퇴원수속 밟으라는데 당분간 엄마를 집으로 모셔야겠어”
텀블러 뚜껑을 열어 둔 탓에 금세 커피가 식어있었다. 그녀는 쓴 물을 들이켜고 읽던 책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난 뭐부터 해야 되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검색창에 ‘난소암’이라고 썼다. 폐경 전후 여성에서 많이 발생하는 난소암은 대부분 3기부터 발견되었다. J는 평소 복부 팽만감과 소화불량으로도 조기 발견가능하다는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아뿔싸! 가스활명수를 수시로 들이켜던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쾌청한 하늘처럼 유려했던 그녀의 일상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불안’이 머리 위로 내려앉자 정수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자료실로 올라가 무작위로 난소암에 관련된 책을 펼쳤다. J는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건강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생각보다 건강해지는 건 참 쉽구나’라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알려준 돈 안 들고 건강해지는 방법을 메모해 두었다가 퇴근한 남편에게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것이 기뻤다.
의학서적은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질병과 치료약에 얽힌 실제 환자의 에피소드로 가볍게 운을 떼는 서두조차 아득했다. 핸드폰으로 전문용어를 3개쯤 검색했을 때 J는 책을 덮어버렸다.
치료는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결심한 후 요리 쪽으로 관심을 돌린 그녀는 도서검색대에 앉아 떠오르는 단어를 조합해 보았다. ‘암 식단관리’, ‘자연식 레시피’, ‘항암밥상’ J는 암 예방은 물론 치료 후 관리까지 빠짐없이 소개한 요리책을 무려 5권이나 대여했다.
마지막으로 랭킹순위가 가장 높은 난소암 환우들의 카페에 가입했다.
하루종일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로 피곤했다. 겨우 병명만 나왔을 뿐 아직 치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실체 없는 고민과 걱정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몹시 보고 싶었다. 드라마였다면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대사가 흘러나왔을지 모른다. J는 작년 어머님이 보내주신 집된장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자작한 된장찌개를 끓였다. 거기다 빨간 맛 제육볶음까지 곁들이면 남편은 소주를 찾겠지.
띠리리릭.
퇴근한 남편을 마주한 순간 참아왔던 수도꼭지가 터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