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오소년 Sep 08. 2023

며느라기

제3화.

J는 언젠가부터 주말연속극을 보지 않게 되었다. 신파에 신파가 덧입혀진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가 좋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주인공의 다음 대사가 점쳐질 만큼 진부한 결말임에도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따스한 인류애를 찬양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뜬금없는 건강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주인공에빙의 되어 돌아올 주말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면 어김없는 암 진단이 내려져 있었다. ‘내 저럴 줄 알았어. 죽여야 끝나지’ 저자극 티슈로 팽팽 코를 풀며 콧구멍의 개방감을 한껏 느끼던 그녀는 돌연히 한국방송작가협회에 화가 치밀었다. 멀쩡한 주인공을 하루아침에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머리에 두건을 씌우는 것에 쏟은 자신의 눈물 한 대접을 자책하면서...               








“어머님이 암이라고. 진짜야? 진료차트가 뒤바뀌거나 아주 가끔 담당의사가 오진하기도 하던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J는 남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이어갔다. 난소암 3기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방황했다. ‘암’을말하는 남편의 건조한 말투가 사뭇 ‘감기’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암에 걸린 주인공을 보아왔지만, 정작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암에 걸릴 거라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담담하게 말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냥 운이 나빠서 걸린 거야. 지금 이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데. 퇴원수속 밟으라는데 당분간 엄마를 집으로 모셔야겠어”         




텀블러 뚜껑을 열어 둔 탓에 금세 커피가 식어있었다. 그녀는 쓴 물을 들이켜고 읽던 책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난 뭐부터 해야 되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검색창에 ‘난소암’이라고 썼다. 폐경 전후 여성에서 많이 발생하는 난소암은 대부분 3기부터 발견되었다. J는 평소 복부 팽만감과 소화불량으로도 조기 발견가능하다는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아뿔싸! 가스활명수를 수시로 들이켜던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쾌청한 하늘처럼 유려했던 그녀의 일상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불안’이 머리 위로 내려앉자 정수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자료실로 올라가 무작위로 난소암에 관련된 책을 펼쳤다. J는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건강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생각보다 건강해지는 건 참 쉽구나’라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알려준 돈 안 들고 건강해지는 방법을 메모해 두었다가 퇴근한 남편에게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것이 기뻤다.

   

의학서적은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질병과 치료약에 얽힌 실제 환자의 에피소드로 가볍게 운을 떼는 서두조차 아득했다. 핸드폰으로 전문용어를 3개쯤 검색했을 때 J는 책을 덮어버렸다.

     

치료는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결심한 후 요리 쪽으로 관심을 돌린 그녀는 도서검색대에 앉아 떠오르는 단어를 조합해 보았다. ‘암 식단관리’, ‘자연식 레시피’, ‘항암밥상’ J는 암 예방은 물론 치료 후 관리까지 빠짐없이 소개한 요리책을 무려 5권이나 대여했다.      


마지막으로 랭킹순위가 가장 높은 난소암 환우들의 카페에 가입했다.


하루종일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로 피곤했다. 겨우 병명만 나왔을 뿐 아직 치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실체 없는 고민과 걱정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몹시 보고 싶었다. 드라마였다면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대사가 흘러나왔을지 모른다. J는 작년 어머님이 보내주신 집된장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자작한 된장찌개를 끓였다. 거기다 빨간 맛 제육볶음까지 곁들이면 남편은 소주를 찾겠지.








띠리리릭.

퇴근한 남편을 마주한 순간 참아왔던 수도꼭지가 터져 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며느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