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잠이 오지 않는 밤. J는 내일이면 정든 안방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12년 차곡차곡 일궈놓은 자신만의 세계에 균열이 가해진다는 상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드는 남편을 보는 건 한없이 측은했지만,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네 엄마지 내 엄마냐?’ 레인지에 30초간 우유를 데웠다. 쿠션을 가져와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왼쪽으로 돌아누워 잠을 기다렸다. 팔이 저렸다. 자세를 고쳐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득 요의를 느껴 눈을 떴을 때 전자시계는 두시 삼십 분을 가리켰다.
J가 기왕에 어머님을 안방에서 모시자고 말했을 때 남편은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하는 얼굴로 가뜩이나 처진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노년의 삶이란 어쩌면 밤새 하얀빛과 열기를 뿜는 전자파 앞에서 벌이는 사투극일지도 모른다. J는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나고, 텔레비전 앞에서 주무시던 제 엄마가 어른거렸다. 엄마는 드라마를 기다리다 초저녁에 깜빡 졸면 자정 무렵에 깨어나 백색소음을 배경으로 한 칸짜리 방 안에서 불침번을 섰다. 눈을 감아도 멈추지 않는 생각들로 뒤척이던 엄마 덕분에 원치 않는 밝은 밤을 보내야 했다.
그래, 어머님을 안방으로 모셔야겠어.
적극적인 아내의 지지에 용기를 얻은 Y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새벽 운동 말이야. 엄마도 같이 걸어보는 건 어때? 어차피 매일 운동시켜드려야 하거든”
평생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취미활동으로 1년 전 새벽 달리기를 선택한 J였다. 적막하고 고요한 새벽의 여유를 만끽하며 달리면 전날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졌다.
‘여보, 그건 운동이 아니라 산책이잖아.’ 그녀는 초점을 거둔 채 조용히 눈을 끔뻑였다.
남편을 기쁘게 만들자니 그녀가 슬퍼졌다.
“얘 화장실이 어디 있니?”
어머님이 오셨다. 3시간 여독보다 화장실이 급했다. 평생 잠자리 날개 같은 몸빼 바지를 입고도 본질적으로 당당함이 몸에 밴 그 여인은 어디로 갔을까. J는 뿌리에 힘이 없어 짧고 희끗한 털뭉치를 한 늙은 여인을 욕실로 안내했다.
흑미에 서리태까지 넣은 잡곡밥과 새우로 고명한 맑은 순두부찌개, 반찬가게에서 산 열무물김치와 회심작 보리굴비를 정갈하게 상에 올렸다. 암 식단 가이드에는 앞으로 시작될 고된 항암치료를 잘 이겨내려면 운동만큼이나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J는 이 말을 머리로 이해했다. 그리고 무리 없이 구현해 낼 수 있는 메뉴들로 식탁을 채웠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노릇한 굴비 살을 발라 어머님 밥그릇에 올려 드렸다. 큰아이 백일잔치 때가 마지막이었지 아마. J는 본인 입으로 한 번을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소리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어머님, 보리굴비 안 좋아하세요?”
어머님은 굴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검정콩은 덜 삶겼고, 순두부찌개는 맹탕이었으며, 굴비는 비리다고 했다. 대접을 찾아 밥을 말고, 물김치로 겨우 밥알을 삼키면서도 굴비 살점을 비켜갔다. 대가리를 깨고 눈알을 신나게 헤집던 여자는 염려보다 자신의 수고로움이 덧없었다는 것에 약간에 짜증이 밀려오던 차였다.
“생목 올라서 더는 못 먹겠구나”
점심 설거지를 하고, 방울토마토 꼭지를 따는 와중에도 안절부절 화장실만 들락거리는 어머님이 시야를 방해했다.
그제야 J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