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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Dec 04. 2023

며느라기

제5화.

'어머님, 사랑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린넨 프릴 앞치마를 두른 어린 새댁은 경쾌한 마음을 꾹꾹 눌러 감사 카드를 전했다. 남편 위로 누이가 둘,

"인저 너는 내 막내딸인겨." 심란한 가족사임을 알고도 오히려 새댁을 두 팔 벌려 안아준 시어머니가 아닌가! 새댁은 어른으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했다. 딸 같은 며느리가 되리라 결심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더 이상 프릴 앞치마를 입지 않는다. 새댁의 몸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큰 몸빼바지를 추스르고, 머리부터 목까지 완벽히 감싸지는 모자를 썼다. 어머님을 따라 마늘을 심고, 고추를 따고, 고구마를 캤다. 새댁은 농활 나온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인증샷을 찍어 톡방에 공유하면, 어느새 '착한 며느리'라는 칭송과 함께 박수와 엄지 척 이모티콘이 달려있었다. 또 밤이면 8시 주말 연속극을 보며, 뒤꿈치에 곶감 가루를 잔뜩 매단 어머님 발을 잡아끌어 젖은 수건으로 닦고, 정성껏 바셀린을 발라 드렸다. 티브이 속 악독한 시어머니 배우와 현재의 시어머니를 번갈아 보면서.


1박 2일 농촌체험에 끝나면, 트렁크 안에는 풍성한 채소와 각종 들기름, 된장, 고추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해 줄 수 있겠니. 줄 때 받아라."

어머님은 새댁의 손에 기름값 5만 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효도가 세상에서 가장 쉬웠고, 평온한 나날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오만했다.








"애미야!"

다급한 호출이었다. 물기 젖은 손으로 화장실을 찾았을 때 변기에 앉은 어머님은 바지춤을 움켜쥐고 있었다. 휑한 정수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던 것도 같다. 며느리 앞에 처참한 치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노인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제야 참기 힘든 대변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J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당혹스러운 순간이었고, 둘 사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인저 너는 내 막내딸인겨."

귀를 타고 시어머니 환청이 들려왔다. J는 호들갑 떨지 않고, 최대한 태연하게 딸처럼 굴었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바지랑 속옷 새로 꺼내 드릴게요."


비로소 J는 시어머니의 막내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참담해졌다.








여름 햇빛이 능소화 꽃잎에 닿았다.

검은 봉지 속에 성인용 기저귀를 감춘 J는 담장으로 고개 내민 능소화 덩굴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쩌면 그리도 당당한지, 남의 집 벽돌담을 악착같이 기어오르며 여름 풍경을 장악해 버렸다. 이마에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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