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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2. 2022

베를린을 가보자! 가보면 알겠지


독일 남부 투어만 다닌 나에게 독일의 수도 하면 ‘뮌헨’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뮌헨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우리에게는 ‘알리안츠 아레나 스타디움’과 ‘바이에른 뮌헨’ 축구팀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에게 독일은 사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로 처음 각인 된 나라였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나라. ‘유대인을 학살한 나라’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분단국’ 독일 하면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하나 같이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사실 Emily와 나를 베를린으로 이끈 가장 큰 계기는 하이델베르크 양조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알게 된 독일인 친구였다. 그 친구를 비엔나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그의 친구인 체코인 한 명, 잘생긴 슬로베니아 한 명과 밤새 술을 마시면서 동유럽 사람들이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었다.



“ 너 그때 그들이 했던 말 기억나?”


“ 아아. 기억나지 우리에게 너희도 세계 2차 대전 덕분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거 아니냐고 했던 체코사람?”


“ 맞아. 나 사실 그 말이 좀 충격적이긴 했거든.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기에는 나의 영어 실력이 짧았던 것도 맞지만. 그걸 독일인 친구 앞에서 꺼내도 되나 싶었어.”


“ 나는 체코인, 독일인, 슬로베니아인 셋과 한국인 둘이 있는 자리에서 세계 2차 대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서 놀랐다.”


“ 맞아. 그리고 나는 독일사람이 사과를 했다는 것도 놀랐어. 본인 잘못도 아닌데 말이지.”


“ 그러니까, 대체 독일인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길래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 베를린을 가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독일 남부에서 나는 전혀 전쟁을 느낄 수 없었단 말이지.”


“ 베를린을 가보자. 이번에는 ”



지난번 여행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과거의 전쟁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점령국 출신의 친구와 본인이 한 일도 아닌데, 과거 조상이 저지른 일로 아직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독일인의 반응이 너무 신선하다 못해, 놀라웠다. 물론 그들은 한 연구실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이라는 것도 그리고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그렇게 잘생겼다는 걸 처음 알아서 또 충격이었던 날이었다... (슬로베니아에서 본인의 얼굴이 평범하다고 말했다...) 더 웃긴 건 유럽인들이 몇 년생이냐고 물어 보더니 “우리는 다 동갑이야 슬로베니아 빼고” 라고 말한 사실이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하이델베르크-뉘른베르크-뮌헨으로 이어진 나의 남부 투어에서 나는 단 한번도 전쟁과 관련된 것들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뮌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즐겨 찾았다는 오래된 맥주집에서 히틀러가 사랑한 맥주를 마시면서야 ‘아, 이곳이 전쟁과 관련된 곳이구나.’라는 것 정도만 느꼈을 뿐이었다.




베를린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현대적, 근데 뭔지 모르게 좀 스산하다’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게스트하우스에 도미토리를 예약을 한 나는 그냥 호텔로 예약을 할 걸 이라는 후회를 일으켰다.



베를린역에서 나와 한참을 걸어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고 나니,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은 아주 발랄한 스페인 친구들이었다. 사실 나는 여러 번 도미토리에서 숙박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방을 쓰는 것에 익숙했지만, 이 언니들은 좀 강적이었다. 내가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언니, 아무것도 안입고 그냥 화장실에서 나오던 언니 그 이후에 파자마 파티를 즐기는 언니들을 바라보며, ‘오늘 밤에 잠은 다 잤다..’ 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짧은 영어로 조금 같이 놀다가 난 잠에 들어 버렸다.



두 번째 날 저녁에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재 비상벨이 울리면 일단,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문밖을 내다 본다. 그것도 전부다 같이.. 그런데 외국인들은 달랐다. 방에서 술 마시고 음악을 즐기던 그들이 화재 비상벨이 울림과 동시에 전부 다 밖으로 냅다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어본 나로서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캐리어는 방에 두고서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만 들고 따라 달려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불이라도 난 거면, 이건 진짜 큰일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로비로 나가보니 그날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있었다.



” 나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 또 뭔일이야. 왜 어디 갈 때 마다 사고를 치는 거야 대체.“


” 내가 친 사고가 아니야.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지 뭐야.“


” 그래서? “


” 그래서 나는 일단 밖의 상황을 알아볼까 하고 보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뛰어 나왔어. 정말 빛의 속도로. 근데 나는 이와중에 가방을 들고 나왔다? 여기서 가방 들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너무 창피하다.“


” 역시 유럽의 조기교육은 대단하구만. 뭐 어때, 넌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와야 하니 가방 필요하다구.“


” 그니까, 난 한국 가야 하니까 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여기 대체 뭘까. 소방서에서 나와서 점검하기 전에는 못 돌아간대.“


” 아, 철저하네. 잘 때도 가방 잘 들고 자라. 또 비상벨 울리면 뛰어나가야 한다. 바로.“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건지 알고 싶지만 직원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누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알 수 없기에 영어로 물어보기 시작했고, 난 내가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 결국 우리끼리 해결이 되지 않아 외국인들에게 질문을 하고 나서야, 화재 비상벨이 오작동으로 울리게 되었고, 지금 소방서에서 나와서 점검중인데 점검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방에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 화재 비상벨이 울린 것도 처음 있는 일인데, 무엇보다 나는 외국인들의 그 빠른 대피 능력이 너무 인상이 깊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방을 챙겨 나온 것도 나 혼자라는 생각에 약간 민망해지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이런 대피 훈련을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받아와서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싶었고, 이런 교육은 어떻게 받은 건지 너무 궁금했다. 종종 우리나라에서도 화재 비상벨이 울린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밖을 내다보고 별일 없다는 생각이 들면 대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불이 났으니 울린거겠지! 라고 생각하고 다 나온 것이 아닌가. 사실 가장 필요한 교육은 이런 긴급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교육,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잘 적응 할 수 있는 교육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좀 아쉽지만, 그 이후에 방에 돌아와서, 나의 베를린 투어에 대해서 다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번 베를린 여행은 뮌헨 여행에서 느낀 충격을 내가 직접 느껴 보기 위해서 여행의 주목적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베를린을 경험해 보기’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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