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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2. 2022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베를린'

‘난 왜 여행을 와도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것일까?’ 라고 궁시렁거리면서 또 아침 9시부터 여행을 시작해 보았다. 사실 이날 집에서 연락이 와서 대체 넌 어디에 있는 거냐고 아침부터 혼나서.. 현재 나의 위치를 설명하느라 잠이 깬 것도 있었다.. 보통 여행 계획을 드리고 오는데 나의 여행 계획은 첫날과 마지막 날 말고는 아마도? 이쯤일걸? 이라는 애매 모호한 계획표 한 장 달랑 냉장고에 붙이고 왔으니 궁금하실 만도 했다. 그렇다고 굳이 화재 비상벨이 울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비밀로 하기로 했다.


우선 간단히 커피 한잔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어디 갈지를 정해 보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궁전과 성당, 그리고 박물관에 지친 나로서는 그 모든 것을 여행지에서 빼버리기로 하고 그냥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 넓은 베를린을?!


” 오늘은 어디가냐.“

” 나 오늘 좀 바빠.“

” 그니까 어디가는데 바쁘냐.“

” 오늘은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 체크포인트찰리- 테러의 토포그래피- 브란테부르크 문을 가볼까 해.“

” 그걸 하루 만에 다 갈 수 있어?“

” 응 거의 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인데?“


가장 먼저 버스를 타고 독일 전승 기념탑과 국 의사당을 구경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쪽으로 향했다. 거기서부터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이었다.


실제로 이곳에 도착했을 때, “와...”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일본에는 이런 추모 공원이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 자신들의 과거를 인정하고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 공원을 만들어서 그냥 걸어가는 일반 시민들도 과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 와, Emily야 여기 좀 뭐랄까... 스산하면서 숙연해지는 장소다. 유대인 학살공원이래. 나는 처음에 뭔가 크기가 다른 직육면체들이 너무 많이 놓여 있길래 이게 대체 뭔지 했는데, 여기가 바로 추모공원이었어.“

” 무서워?“

” 약간? 예전에 비엔나에 있는 공원묘지에서 산책 했을 때보다 더 스산해.“

” 거기는 꼭 가봐야겠네.“


우리는 보통 나의 잘못을 ‘흑역사’ 라고 부르면서 더 이상 떠올리지 않고 싶어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겉으로 드러내고 아직도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나라가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킨 나라지만, 국제 사회에서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이었지만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나와서 현장학습을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역사 시간일 것 같았다. 독일인들, 그리고 유럽의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에 직접 와서 본인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약간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한군데를 더 가보기로 하였다. 두 번째로 갈 곳은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이었다. 이곳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나치가 세운 대부분의 계획이 수립된 장소였다. 박물관 입장은 무료였고, 생각보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주로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던 유대인의 학살에 대한 자료에 대해서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독일어로 말하는 도슨트도 있었지만, 아쉽게 알아듣지 못해서 열심히 영어를 해석해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이 영어로 읽기와 듣기는 잘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때, 독일어 수업을 좀 더 열심히 들어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있는 사진들을 찍어 오지는 못하였지만, 사진들을 보면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도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던 독일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특히 전쟁에 사용된 전쟁 무기를 만든 과학자들의 사진도 있었다.


테러의 토포그래피를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작년에 학생들과 과학사 수업을 진행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증기기관차를 만든 사람에 대한 국제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의 질문은 “히틀러가 지시해서 가스 증기기관차를 만든 과학자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한 국제 심판이 옳았다고 생각하나요?”라는 것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그렇다’ 라고 답했다. 과학자는 과학자로서의 업적과 양심 중 고민을 한다면 양심을 선택해야 한다는 토론을 하였다. “그렇다면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핵무기를 만든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우리나라는 핵무기 덕분에 일본의 지배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나 역시 이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 판단을 해 줄 수 없었다. 오로지 학생들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열린 결말로 수업을 끝내면서, 나의 역사 지식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내가 과학자의 입장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직은 부족한 나의 역사 지식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던 수업 시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마지막으로 ‘체크 포인트 찰리’로 향했다. 이곳은 과거 베를린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을 때의 검문소였다고 한다. 베를린은 한 도시 내에서도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DMZ라는 부분이 있어서 아예 왕래가 안되는 것과는 다르게,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장벽을 쳐두고 있어서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 지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상황을 아주 잘 보여주는 책이 하나 있었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모멘트」 라는 소설로 통일 독일 이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와 분단과 냉전으로 상징되는 비극의 역사에 대해서 쓰고 있다.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동독과 서독 주민들의 전혀 다른 삶을 표현하고 있어서 분단된 독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여행할 때 읽은 책은 아니고, 삿포로 여행을 하면서 읽은 책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삿포로 호텔에 앉아서 사온 맥주를 다 마셔 버릴 정도로 몰입감이 높았던 책이기도 했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의 두 번째는 그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무엇인가를 내 삶에서 찾았을 때라고 생각한다. 독일에서의 추억을 일본 여행에서 다시 떠올리게 해 준 것이 ‘소설책’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나니, 급 피로함이 느껴졌다. 오전 내내 역사 공부를 한 느낌이었고, 이번에는 베를린의 현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을 왔으면 가장 중요한 것은 돌아갈 때 지인들을 위한 선물 아닐까. 나 혼자 너무 좋은 곳을 다녀와서 미안하다는 의미와 함께 여행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매개체. 나는 베를린에서 유명하다는 독일의 초콜렛 가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초콜렛 하나를 사면 일주일 아니면 한달 동안 먹는 사람인데 말이다.



“ Emily야 나 지금 어딨는지 아니?”

“ 어디니 지금은?”

“ 나 지금 리터스 초콜렛 매장인데, 엄청 큰 초콜렛 모형이 DNA처럼 쌓여 있어. 엄청 거대하다.”

“ 너 거기가서 이과인거 티내냐. DNA가 뭐여. 그냥 나선형으로 쌓은거지.”

“ 그러네 나선형이네. 근데 난 이런걸 보면 DNA밖에 안떠올라.ㅋㅋㅋ”


사실 나는 초콜렛보다는 독일 젤리인 ‘하리보’의 팬이다. 유럽 여행을 오면 처음 보는 하리보 젤리들은 모두 쓸어가서 한국에 돌아와 저장해 두고 도토리처럼 꺼내 먹을 정도인데, 베를린에서는 하리보만큼 리터스 초콜렛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장 큰 지점을 찾아서 가기로 했다.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초콜렛 많이 사본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종류가 너무 많다 보니 다 사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는데, 내가 이렇게 쓸어 오면 꼭 조만간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


프랑스에 개선문이 있다면, 독일에는 브란덴부르크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개선문이다. 프로이센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맨 위에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가 올려져 있다. 브란덴부르크는 낮에 보면 고대 그리스의 느낌이 나는데, 저녁에 보면 굉장히 웅장한 느낌이다. 독일 분단의 상징이자 통일의 상징이라고 하길래 그 이유를 찾아보니, 브란덴부르크 앞으로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저 광장에는 추모존이 꾸며져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존으로 보였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독일 역사의 포인트들을 구경하고, 베를린의 현재의 모습도 보고 나니, 독일과 우리나라가 참 많이 닮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뮌헨에서 만난 그 친구가 “앞으로도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해.”라는 말을 괜히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연령대 역시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장년층까지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 이런 역사의식에 반하는 사람들도 독일에서 존재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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