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 법

by 인표

코팅이 되어있는 A4용지 메뉴판 옆에 스테인스 물컵이 있었고, 물컵에 맺힌 물은 PVC 소재 테이블보로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최근 그녀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왠지 평소와 다른 말투로 오늘 보자고 하더라.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웃겨서 너에게 화를 딱 낼만큼까지 화가 풀어졌다.

‘만약 네가 나보고 왜 화를 내냐고 되려 성을 내면 그땐 정말 이 관계는 끝이야.’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언어적인 교류, 언어적인 교류 모두 무시하고 의미를 잃어버린 텍스트만 뽑아내는 사람이라면 더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랬듯,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몇 번을 확인받아도 다시 한번 더 의심한 것이지만, 그렇게 큰 죄책감이 있지는 않다. 홀라당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해 놓고 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든 만나서 이렇게 의심해 주고 화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와 다른 관계라면 몰라도 이 애정 관계를 셈할 때에는 당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빚을 통해서 해결하지 못한 그와의 오래된 셈법 하나를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내가 빚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늘 그렇듯 빠르게 갚으려고 했다. 도저히 갚을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아 어떻게 이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모든 것을 갚을 필요가 없다 말했다. 그렇게 이게 마음에 걸리면, 너도 누군가가 끝까지 몰려있을 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네게 갚아야 셈이 끝나는 사람이라고. 그게 어떻게 네게 갚는 거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어. 너는 내게 그렇게 답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어쩌면, 이건 진짜 그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용서하는 대신 남에게도 한 번쯤 그러라는 건 어쩌면 닳고 닳은 문장이니까. 꼬리를 물고 선행을 베풀자는 공익적인 메시지는 넘쳤으니까. 실제 너에게 돌아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이 사회에 한 번 셈하지 않는 진심을 푼다고 해서 네게 그런 사회가 돌아가지 않을 텐데. 그냥 들어본 말을 본인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어쨌든 지금 내가 끄덕인다면 너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뿌듯함을 가져가지 않을까? 네게 주는 내 첫 번째 셈으로 하자. 나는 그때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로 조금의 빚을 갚았으니, 그동안과 같이 빠르게 이 빚을 청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셈의 기회가 찾아왔다. 너는 죽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그때는 신촌 대학가의 술집이었다. 거기의 메뉴판도 코팅된 A4용지였다. 맥주와 소주 가격을 가장 크게 써놓는 그런 메뉴판. 어두운 검은색 벽들 사이에 등받이 없는 의자 네 개가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곳. 그 의자에 앉은 너의 얼굴에 깊은 두려움이 어린 순간, 나는 기뻐하고 말았다.

나는 네가 진심으로 힘들 때를 기다려왔다. 나처럼 무너지고야 말 때, 그 이야기를 모든 생각에 묻히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때, 비로소 모든 터널을 빠져나와야만 내가 터널 안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모든 걸 토해내고 나서야 내가 토해내듯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알 때. 다 토해낸 다음에야 나를 부축하고 있던 이 사람이 나와 동등한 대화를 하고 있던 게 아니구나, 나를 챙겨주고 들어주고 있던 거구나, 나는 마치 주사를 부린 것이구나. 나와 친밀하다는 이유로 그 주사를 다 들어준 거구나. 그렇게 느낄 때. 그때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네 옆에 있고자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돌려주는 건 내 셈법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정확히 네게 돌려줘야만 했다.

그러나 그 셈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죽음이 그렇게 무섭구나. 죽을 것 같은 이 사회가 아니라 죽음을 무서워하는구나. 이 술집과 밤거리, 사람과 사람, 한강과 바다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무서워하는구나.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죽음까지 닿아 무서워하기에는 내 마음이 들릴 곳이 많았다. 거기까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내가 삶에 미련이 많지 않다고 말하면 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죽지 말라고 말할까? 소중하고 숭고한 삶에 대해 찬양할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죽음이 무섭다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말하는 삶의 찬양은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아니, 솔직히는 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이 삶을 기고 있는데, 너는 저 높이 앉아 저 멀리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소맥을 잔뜩 말아놓은 피쳐잔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호기심과 악의를 섞어 말을 건넸다.

나는 굳이 굳이 살아가야 하나 싶어. 살다 보면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아. 지금 죽겠다는 말은 아니야. 이 면 같은 세상에서 점 같은 사람들에게 빚진 것들을 다 갚으면, 그때는 진짜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셈이 다 끝나면, 그때는 진짜 세상에 남을 이유를 새로 찾아야만 살 수 있을 거야. 이 셈은 내가 죽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내게 걸 수 있는 마지막 안전장치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는 인정 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속 어딘가 죽기 싫어하는 나의 발악일 수도 있고.

그는 내가 원했던 만큼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없어하는 와중에도 내게 죽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날은 오지 않겠구나. 죽기 싫어하는 놈들의 특징인 걸까. 어디서 올곧게 자란 나무 같았다. 아, 그러니까 죽기 싫어하는걸까. 속이 곪아 죽을 언정 어디로 쓰러지고 휘어지지 않. 죽어서도 그 덩치를 쓰러지지 않고 세상에 남기는 큰 고목 같은. 어쩌냐, 나는 휘어지고 쓰러져서 너에게 기댔는데. 너는 내게 기대지 않을 예정이구나. 어떻게 이 빚을 갚으라는 말일까. 나는 네게 빚을 갚고 죽을 수 있을까.

네가 처음 말한 대로 세상에 빚을 돌려줘야 할까? 그건 정말 빚을 갚는 일일까? 혹시 세상에 그 호의를 돌려받겠다는 그 말은 세상과 너의 크기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는 말일까. 죽는 걸 무서워한다는 너같이 오만한 사람들만 가능한 발상인지도 몰라. 결국 그날은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한 채로 두 번째 셈의 기회를 날렸다.

그게 내가 너에게 끌린 이유다. 이런 사람과 옆에 계속 있는다면 어떨지 궁금했다. 동시에 너에게 끝까지 다가가지 못한 이유다. 나는 너를 평생 미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데, 너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여유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나는 그 여유와 곧음을 질투하고 살 거다. 그 속이 곪아있을 거라며 저주하고 살 거다. 내 마음속 가장 악한 나는 네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 ‘거 봐라.’ 하고 말할 기회를 노리고 숨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네가 그 속에 어떤 고통을 안고 사는지 알고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을 거라고.

두 번째 셈의 기회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너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낮에 카페에 앉아서.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리는 야외 나무 벤치에서. 햇빛이 그렇게 밝았다. 배신감이 들었다. 미웠고, 화났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이걸로 셈이 끝난 셈 치자. 너같이 오만한 사람을 어떻게 잘 찾아서 만났구나. 그럼 됐다. 세상이 아니라 네게 이 호의를 돌려줘서 다행이다. 그렇게 내 셈법에서 그가 건네줬던 호의를 모두 갚은 셈 쳤다. 그날 구름이 정말 새하얬고, 햇빛이 정말 시퍼다.

그런데 왜 너는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이 지독한 채무 관계의 물꼬를 트려고 하는 걸까. 이번에는 얼마나 갚기 어려운 것들을 빌려주려고 다가오는 것일까. 어떤 염치를 가지고 내게 호의를 빌리러 오는 걸까. 혹시 나는 세 번째 셈이 필요하다고 느꼈을까? 한 번은 더 만나주어야 그래도 셈일 맞다고 느낀걸까. 남은 부채감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어젯밤 망원의 한강공원은 아름다웠다. 네가 말과 함께 술을 삼키며 주량 끝까지 달리는 모습까지 말이다. 취하였는지도 모른 채 한강 너머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참 멀게도 느껴졌다. 나는 그 멀리까지 시선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네가 마시는 알루미늄 맥주캔, 옆에 앉아 있는 너, 내 엉덩이 밑에 눌린 짙푸른 잔디. 나는 어두운 한강 너머를 살필 여유와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야. 너와 나는 딱 아름다울 정도로 먼 거리에 앉아 있는 게 맞는 거야.

어젯밤 한강의 어두움이 모두 잊히고, 오늘 다시 해가 이미 뉘엇거리기 시작하는 시간에 도착한 카톡이 참 웃겼다. 이건 네게 받아낼 셈일까. 네게 돌려줘야 할 셈일까. 한 번 따져보기로 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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