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잔

by 인표

목이 긁히는 것 같은 갈증, 입은 말라붙어 건조했다. 떨어지는 부유감에서 벗어났다. 몸은 안락하게 침대에 파묻혀 있다. 기시감이 드는 꿈이었다. 높은 곳에서 계속해서 다음 발판으로 뛰며 떨어지는 꿈이었다. 멈추는 건 왜인지 모르게 생각조차 불가능했다. 어떤 판을 밟든지 늘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그 꿈이었다. 분명히 전부터 종종 비슷한 꿈을 꿔왔다는 확신에 가까운 기시감이 든다. ‘꿈이란 게 시작이라고 외치며 시작하지 않으니까, 분명히 언젠가부터 살고 있던 사람의 중간에서 시작하니까 그런 기시감을 느끼는 걸까’하는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희미한 기억 속에도 한 가지 꿈을 기억해낸다. 꽤 오래전 그날도 기시감을 느끼며 일어났었다. 많은 기억이 일어나자마자 흐려졌지만 분홍색 하늘에서 불투명한 판 사이 사이를 멀리 뛰어가며 내려갔던 것은 기억이 난다. 오늘은 도시의 옥상에서 다음 옥상으로 건너가는 꿈이었다. 최근 인스타그램 탐색 탭에서 봤던 자전거 도시 다운힐 영상이 재료가 되었을까. 속도감과 시점이 그때보다 더 무서워진 것 같다.

입가가 불쾌할 만큼 건조하게 갈라져 있다. 입을 벌리고 잤나. 환절기에 집 앞 철거공사까지 합쳐져 코가 막히나보다. 여름에 창고에 집어넣은 가습기를 꺼냈어야 했나. 사실 어제 물만 조금 더 마시고 잤어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맥주나 음료수 같은 것들을 물 대신 마시고는 갈증을 다 해소했다고 신나서 잘 때 이런 일이 종종 생겼으니까. 그래서 술을 마신 날에는 의식적으로 물을 더 마시고 자는 버릇이 있다. K는 내게 물을 잘 챙겨 마시는 습관이 있는 게 부럽다고 말했다. 갈증을 달고 사는 나와 달리 K는 갈증을 잘 느끼지 못했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너무 조금 마시면 몸에 안 좋다니까 의식적으로 종종 물을 입에 적시던 게 다였다. 내가 물을 마시는 이유는 건강이 아니라 갈증 때문이었는데, 조금 엇나간 부러움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러움이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누가 물을 얼마만큼 마시고 사는지는 하찮으면서도 생활을 공유하는 최심부의 인연에만 공유되는 정보다. 독립하기 전에는 엄마가 비슷한 말투로 내 물 마시는 습관을 부러워했다. 그런저런 생각에 조금 멈칫하는 사이 그녀는 벌써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가버렸다. 처음 만났던 순간만큼 최심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최심부의 하찮은 습관을 공유할 동안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눠왔던 걸까. K 너와 내가 아직 만나고 있었다면, 나는 네게 오늘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내게 오늘의 꿈은 죽어가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멈출 수 없이 떨어지는 꿈이다. 바닥은 멀어 보이지만, 동시에 결국 바닥에 도달해서 더는 떨어질 곳이 없어질 거란 인식을 준다. 후룸라이드는 높지만 금방 끝나는 놀이기구인 것처럼. 지금까진 한 번도 빠짐없이 성공해 왔지만 단 한 번 잘못하면 떨어져 버리는 아슬아슬함. 아무리 잘 뛰어도 결국 종착지에 다다르면 더는 뛰어내리지 못한다는 정해진 절망. 내가 분홍색 하늘에서 반투명한 발판을 건너는 꿈과 도시의 파쿠르 꿈을 동일시 하는 건 모두 내게 죽어가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는데 왜 사냐는 6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죽음에 사로잡혀 지냈으니 죽음의 형태가 재구성된 꿈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다. 그리고 K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나와 같이 진심으로 죽음을 무서워하니까. 이 인생은 결국 끝난다는 생각이 한 번 들면 일상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니까. 그 공통점으로 만난 인연이지만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거다.

나는 그 꿈에서 분명히 한 줄기 즐거움이 있었다. 나는 지독히 죽음을 무서워하는 동시에 죽음을 사랑한다. 내게는 죽어가는 꿈이지만, 그건 내게 곧 살아있다는 꿈이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게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끝이 보이는 한강이 바다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끝이 없는 인생보다 끝이 있는 인생이라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K도 죽음을 사랑할 줄 알았다. K가 죽음을 사랑했으면 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 세상에 나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그런데 너는 왜 죽음을 사랑하지 않는지. 조금 비겁하게 이야기를 꺼냈을지도 몰라. 이런 꿈을 꿨다면서, 네가 결국 화냈던 언젠가 그때처럼 네가 좋아했다는 영화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말이야. 죽음이 무서워서 이야기는 피하면서, 실존적인 소재가 범벅인 그런 영화들을 제일 좋아한다니. 영화 이야기는 또 괜찮다는 게 어떤 감각일까. 나는 네가 결국 피한다고 생각했어. 결국 너는 나를 처음 만난 날 내게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말을 꺼냈잖아. 나는 그날 밤의 칵테일바를 기억하는데. 바테이블 위 촛불 심지에 불이 붙는 속도로 무언가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네게서 다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건 욕심이었을까. 네 깊은 속에서 죽음을 꺼내려 할 때마다 네 기도 안의 가시에 내 손이 찔리고 말았다. 가시는 손에 같이 박혀 딸려 나왔어. 가시가 뽑혀 나온 네 속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지금 돌아보면, 나는 멈춰야 했다. 이야기를 멈추고 저 속 어딘가에 있을 동질감을 믿으며 관계를 이어가거나, 혹은 관계를 거기서 멈추거나. 그러나 나는 언제 또 저 마음속 깊은 동질감을 발견할지 알 수 없었다. 끊어내지도,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들어가지도 않은 채 그 애매한 한 발 걸친 지점에 멈춰있었다. 저 안쪽을 계속 탐내면서. 보지도 않은 영화를 검색해 가면서 연결할 이야기를 찾아 대화했었다. 멋 없고 구차했었다. 항상 다급했었어. 언제는 겨우 찾은 네가 떠나갈까 무서워서 관계에 집중했고, 언제는 그래서 영영 처음 만난 칵테일 바의 이야기는 하지 못하게 되나 싶었어. 둘 다 그렇게 되었네. 너와 나는 헤어졌고, 우리는 영영 대화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빛에 방 풍경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외투는 방바닥에 그대로 던져져 있다. 그 와중에 물을 마셔야 한다고 정수기 밑에 가져다 둔 머그컵이 보인다. 이제는 진짜 물을 마셔야겠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일어나 머그컵까지 걸어갔다. 어제 그 정신에 출수까지는 눌러놓았는지 머그컵에는 한 컵 분량의 물이 담겨있다. 그대로 싱크대에 물을 버리고 새로 물을 담는다. 머그컵으로 쏟아지는 물을 보니 미뤄뒀던 갈증이 다시 몰려온다. 기껏해야 몇 시간 전 받아두었던 물, 바로 마실 걸 그랬나 보다. 더 할 말이 없어서 한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셨던 캔맥주 세 캔이 치명적이었나보다. 이 잠깐의 출수 시간을 기다리는게 고통이다. 이 몇 초를 기다릴 인내심도 없으면서 몇 분을 K 생각으로 보냈는지. 맥주만큼 K와의 이별이 치명적이었구나. J와 함께한 술자리의 숙취로 K 생각을 하고있다. J는 잘 들어갔을까. 모든 걸 놓쳐도 괜찮다는 각오로 K와의 인연을 잡았었는데. 나는 어떤 염치로 J에게 연락했을까. J에게 연락하지 말 걸 그랬다. K와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J와의 인연은 잘못 착지한 멀리뛰기처럼 끝이 나버린 거였는데. 그 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버렸으니 규칙 위반인 게 당연하다. 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하다. 인연이란 게 생명과 달라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인연은 마치 생명과 같아 탄생과 죽음이 있는 법이다. 죽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살아있는 한 번의 생에서 자존심과 그럴싸한 모습에 연연하다 J와의 인연을 끊기 싫었다. 그러나 그건 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연의 끝을 존중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 역시 J에게 연락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로 돌아가 핸드폰을 켰다. J에게 잘 들어갔냐고, 나는 어제 잘 들어갔고 오늘 갈증이 너무 심해서 일찍 일어나버렸다고. 주말 잘 보내라고. 엎드린 채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을 지우고 주말에 뭐 하냐는 말을 썼다가 아예 다 지워버렸다가 주말은 그래도 잘 보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썼다가 이게 무슨 부담을 주는 말이냐고 지웠다. 기껏 열심히 했던 생각과 다른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전송 버튼까지 눌러버리는 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이미 출수가 한참 전에 끝난 물 한 잔을 목에 천천히 털어 넣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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