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진짜 크다.”
파란 지하철 창문의 선팅 밑으로 목을 구겨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한강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봤다. 한강이 합정역 가림막 사이로 사라지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있었다.
“한강을 보면 유독 더 거대하다는 느낌이 들더라. 간신히 보이는 반대편 육지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바다보다 더 그 크기가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내 표정을 바라보다가 오늘 저녁 먹고 뭐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신촌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리가 헤어지겠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헤어지지는 못해 나를 내려준 이호선 열차가 두 바퀴를 더 돌 시간이 지날 때쯤 나와 그녀는 연희동 한 카페에서 헤어졌다.
J에게 밥을 먹자고 연락했다. J는 망원동을 가자고 했다. 다시 나는 당산역에서 합정역으로 한강을 가로질렀다. 오늘도 한강은 커다랬다.
J에게 실토하듯 헤어졌다고 말했다. J는 잠깐 멈춘 일 초를 빼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받았다. 아니, 어쩌다가 헤어졌대. 나는 술이 조금 더 들어가고 말하겠다고 했다. 지금 말했다가는 ‘그녀는 한강이 커다랗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만 같았다.
술을 좀 더 들이키다가 J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화를 냈다. 그렇게 좋아 죽던 사람과 왜 헤어진 거야. 헤어지는 걸 그렇게 두려워했었잖아.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노력한다고 했었잖아. 늘 그랬듯 금방 헤어질 거 아니냐는 내 악담에도 너는 가장 헤어지기 어려운 연애라고 말했잖아. 삶의 끝을 무서워하는 사람끼리 만났는데, 어떻게 관계가 쉽게 끝냐겠냐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어야지.
J의 화를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은은했던 관계에서 무언가 시작되려고 했던, 혹은 시작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던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전에 내가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니. 아마 그런 말을 했다면, 내가 두 주 동안 연락이 없다가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던 그날이었을거야. 너한테는 먼저 말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몇 개월을 질질 끌며 서로 더 다가가기 무서워했던 그 관계에 대한 예의 말이야. 그때 나는 너를 앞으로 못 볼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어. 누가 보기에는 무슨 말과 행동이 오간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쨌든 마음이 오가던 사이였으니까. 배신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J야. 나는 다시 생각해도 한 번은 홀린 듯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홀린 듯 빠져들어 희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빨리 관계가 무너졌을까.
J, 해변의 칵테일 바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가 죽음이 실질적으로 두렵다고 했을 때 내가 느꼈을 전율을 J 너는 짐작할 수 있겠니? 오히려 삶에 미련이 없었던 너였기에 그 전율의 크기를 느낄 수 있으려나. 유치원 때에 사람은 어차피 죽는데 왜 살까 고민을 적어내고, 초등학교 때는 철학책을 읽고 죽는 게 너무 무섭다고 안방을 두드리던 아이가 있었어.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초연해진다고 위로했었고, 나도 그만 울고 싶었기 때문에 엄마의 말을 믿었지. 내 생각이 끊기는 게 괜찮아지는 시기가 오려나.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은 순간이 오려나. 엄마는 죽음이 두려워 울어본 적이 없다는 건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어. 주변 친구들도, 어른들도 죽음이 두려워 주기적으로 우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때의 외로움을 아니. 그런 외로움을, 어느때부터 포기하고 고독하게 씹어야만 했던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난거야. 여행지 칵테일바에서 근 이십년만에 말이야.
J, 나는 믿지 못해 계속 확인했어. 정말 죽음이 무서운 게 맞냐고, 교통사고를 당할까 봐, 나도 모르게 불치병에 걸릴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언젠간 죽는다는 그 죽음이 무서운 게 맞냐고 물었어. 몇 마디를 묻던 나는 더는 의심할 수 없었어. 그녀도 대답과 동시에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나도 정말 죽음을 무서워한 사람이 맞냐고 주궁했지. 둘 모두 사후세계를 도피처로 삼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공통점까지 확인해 버렸는 걸. 나는 그날 밤 그녀를 뺀 모든 걸 잊어버렸어.
화를 내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J는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J의 아량에 감사할 지경인데,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며 조금 화낸 것은 몇 번을 받아줘도 셈이 모자르지 않았다.
“미안해. 그때는 그 관계가 내게 모든 것을 채워주리라 생각했어.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지. 6살 때부터의 무서움을 유일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렇게 본질적인 두려움이 같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더라. 본질적인 두려움에 해석이 조금이라도 다른 걸 봤을 때, 인정할 수 없더라고. 나는 죽음을 거부하려고 하는 그녀가 멋없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죽음을 사랑하려는 내가 더는 멋져 보이지 않았던 거야.”
왜 J가 내게 화를 내는지, 왜 내가 미안해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술은 그만 마시고 조금 걷자는 J의 말에 새벽 망원동 거리를 걸었다. 불 꺼진 망원동 시장을 지나 전시용 불빛을 켜둔 채 마감한 몇몇 매장을 보면서 같이 투덜거리다가 네 컷 사진집을 지나쳐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의 물은 검었다. 불 켜진 다리를 따라 시선을 건네면 건너편 휘황찬란한 강둑이 가까스로 보였다. J는 어느 곳을 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우리는 조금 떨어져 강둑에 앉았다. 그전까지 많은 말을 나눴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 서로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반대편 강둑을 바라보며 사이의 강을 느꼈다. 한강을 사랑하며, J에게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