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G병원 벽면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던 현수막이 철거되고 있다.
‘전국 난임 시술 1위, 환자 만족도 1위’
G병원 산부인과 원장인 치흠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G시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G병원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를 이끌고 있는 치흠이었지만 요즘은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초산 연령에 따라 난임률의 상승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과였다. 이에 치흠은 난임 시술에 치중했고 어느덧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 마치 로또 1등 배출 판매점처럼 호사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복을 부르고 하여 G병원의 산부인과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치흠의 명성은 날로 올라갔다. G도시에서 G병원이 있는 G구의 출산율이 2.3이 넘어갔을 때는 해외 언론에 까지 기사가 날 정도였다. 한때는 그랬다. 꿈같은 시절이었다.
끈을 다 잘라낸 현수막이 힘없이 펄럭이며 땅에 떨어지다 가로수에 걸린다. 비스듬하게 걸린 현수막은 바람에 힘없이 나부낀다. 치흠은 짜증이 북받쳐 오른다.
치흠은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와 자신의 무기를 쓰기로 한다. 통계학, 그가 대학교 1학년때 그렇게 귀찮아하며 외면했으나 그 녀석은 석박사 논문을 쓸 때 또다시 등장하였다. 마치 서로 성격이 잘 맞지는 않지만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같은 반에다가 옆자리에 앉게 되어 강제로 친해져 버린 친구 같은 존재랄까.. 그동안 정리했던 통계 자료를 뒤적여 본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어떤 큰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차근차근 벌어진 일인 것 같다. 어떤 인과관계를 알아봐야 할지 막막했다. 제1 야당 총재의 자택에서 네오 나치의 상징물이 발견되어 세상이 발칵 뒤집어진 그때부터인가?(공식 석상에서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며 가발을 벗으며 스킨헤드를 드러내는 장면은 이번 세기 내 최고의 명장면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심해지는 미세먼지 농도에 따라 결국 산소마스크를 각각 편의점에 팔기 시작한 그때부터인가. 아니면 중국 산둥 지방에서 발생한 쓰나미(중국에서는 국제 용어로 사용되는 ‘쓰나미’라는 말을 쓰기 싫어 기를 쓰고 ‘지진해일’로 번안해서 사용했다)로 인해 발생한 원전 사고로 방사성 낙진이 편서풍을 타고 국내로 날아든다며 전국민적으로 집단 발작적인 대처를 했을 때부터인가.(정부는 기상이변으로 편서풍이 약해서 국내의 피해는 미미했다고 발표했다. 모두들 안 믿었지만.)
사건의 발생 시기와 불임 건수의 증가 등을 고려하여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본다. 모두 P값이 허용 범위 밖으로 나와 가설은 모두 기각되었다.
‘똑, 똑’
신입 간호사가 치흠의 진료실 문을 두드리고, 출근 한지 1시간 만에 드디어 첫 환자를 맞이한다. 오랜만에 치흠을 만나러 온 환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만 34세인 여성이었다. 요즘은 성형이 너무나도 쉽고 티도 나지 않다 보니 다들 20대로 보인다. 미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가 20대 중반이라고 생각되는지 다들 그 정도 나이 대의 외모로 성형을 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더 이상 여성의 겉모습으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기사에 소개된 남성이 떠올랐다. 그는 꽤 유능한 프로그래머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결혼할 여자가 외모로는 3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평소 단어 선택이나 말투를 봐서는 50대일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아이를 원했기 때문에 여성의 생물학적 나이는 매우 중요했고 그녀가 20년도 더 된 유행어를 자신 있게 말했을 때 결국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플라이 어웨이 사의 의료 기록을 해킹하려 했다. 물론 이 시도는 거대기업 플라이 어웨이의 보안팀에 의해 손쉽게 제지당했고, 경찰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던 남성이 기자들에게 건넨 마지막 한 마디가 인상 깊었다.
“여러분! 당신과 함께 결혼해서 살고 있는 그 사람이 혹시 50대는 아닐까, 아니 막말로 70대는 아닐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다들 속고 있는 거 아니오?” 하지만 플라이 어웨이 메디컬의 대답은 서면으로 나왔으며 차가웠다.
‘저희 회사 기술은 세포의 위치를 바꿀 뿐이지 세포를 더 어려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치흠 앞의 환자는 자신의 불임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병원에 대한 불평을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이에 기계적으로 답을 하던 치흠은 다음 시술 날짜를 잡고 환자를 얼른 내보내려 했다. 환자는 이에 역정을 내며 다른 병원을 알아보겠다며 나가버렸다. 이제 치흠은 이런 일에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똑, 똑, 똑’
신입 간호사가 치흠의 진료실 문을 두드리고, 출근한 지 1시간 10분 만에 드디어 두 번째 환자를 맞이한다. 오랜만에 치흠을 만나러 온 환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만 34세인 여성이었다. 요즘은 성형이 너무나도 쉽고 티도 나지 않다 보니 다들 20대로 보인다. 미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가 20대 중반이라고 생각되는지 다들 그 정도 나이 대의 외모로 성형을 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더 이상 여성의 겉모습으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기사에 소개된 여성이 떠올랐다. 그는 꽤 유능한 운동선수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어? 데자뷔?’
치흠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환자를 봤지만 아까 들어왔던 환자와 같은 사람이 맞았다.
‘뭐지? 왜 또 들어와서 처음 겪는 일인 양 태연스레 앉아 있는 거지? 신종 괴롭힘인가?’
치흠 앞의 환자는 자신의 불임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병원에 대한 불평을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이에 기계적으로 답을 하던 치흠은 다음 시술 날짜를 잡고 환자를 얼른 내보내려 했다. 환자는 이에 역정을 내며 다른 병원을 알아보겠다며 나가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 착란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 꿈속인가? 혼란스러운 치흠은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신입 간호사가 전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치흠이 간호사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치흠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주한 신입 간호사의 얼굴은 아까 본 환자의 얼굴과 같았다. 아니다. 자세히 뜯어보니 미묘하게 달랐다. 언뜻 봐서는 구분이 안될 만큼 닮긴 했다. 고개를 돌려 대기실을 바라본다. 그곳에도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치흠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간호사를 뒤로 하고 자신의 진료실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내가 이걸 왜 이제 눈치챘을까? 치흠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 시행 건수와 불임 비율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한참 뒤 결과가 나왔다. 이 두 가지 수치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었다.(P <0.05) 불임은 플라이 어웨이 메디컬과 관계있는 것이 확실하다. 치흠의 창밖으로는 나무에 걸린 현수막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4-5.
회장은 최근 들어온 소송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불임이 마치 질병처럼 퍼지며 전국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출산율 저하를 더욱 빠르게 견인하고 있는 와중에, 그 원인을 자신의 회사 책임이라 주장하는 의사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회사가 크는 과정에서 이것보다 더한 협박 같은 것도 많았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회장은 위기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회장은 남들과는 다른 감각 기관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번 사건은 그 감각이 심하게 요동쳤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위기의 맛’이라거나 ‘진실의 색깔’ 같은 공감각적 단어를 들먹였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럼 불임이 그.. 텔레포트 때문이라는 건가요?” 미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통계적으로는 그런 거 같은데 원인을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회장은 전자패드를 건넨다. “여기에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는 다 적혀 있으니 참고하도록 해요.”
미래가 건네받은 태블릿에는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가 분기점마다 갈라지며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 도식적으로 보였다. 수백 가지 이야기의 출발점에 각자 수백 가지 분기점이 있다. 모두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 오로지 미래 예측과 위험 대응을 위해서만 쓰인 소설을 일부의 사람들만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만약 잘 들어맞기만 한다면 이것은 이 회사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될 것이다.
“지금도 계속 업데이트 중인데, 일단 불임의 원인이 우리 회사 있다는 것이 확정 난 뒤에 벌어질 만한 이야기를 쓴 걸 참고하시면 됩니다. 거기 목차에서 ‘불임’ 색인을 검색하시면 되구요.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합니다.”미영은 태블릿을 들고 사용법을 설명해 주면서 말했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한다’라니. 이 사람의 근본은 여전히 소설가구나.
“그럼 우선은 그 의사를 좀 만나봐 주세요.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뒀습니다.” 회장은 이번일이 요약된 서류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일단 제가 이걸 맡는다고 아직 말을 안 했는데요? 혹시 거기에 제 이번 사건에 대한 페이지도 있나요?”
“물론이지요!” 미영은 태블릿을 흔들어 보인다.
“거기에는 내가 지금 이번 사건을 맡는다고 돼있던가요?”
“아뇨, 지금이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이 선택에 따라 미래가 많이 변할 거예요”
미래는 회사에 새로 신설된 미래전략부서의 소설작업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감을 잡았다. 이것은 꽤 혁신적인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텔레포트를 의료용으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느꼈던 감각과 동일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만한 무언가라는 느낌. 미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삶에서 다시금 세상이 확장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무언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미래의 감정을 격양시켰다. 미래에게서 결여된 무언가는 이런 것이었을까?
“뭔가 묘한 구석이 있는 방식이네요. 알겠습니다, 그 의사를 만나러 가죠!”
“우와 재미있어지네요. 조력자가 필요하겠죠? 거기 키워드를 ‘불임’, ‘조사’, ‘조력자’ 이렇게 해보세요” 미영은 자신이 쓴 소설이 실현되는 것에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미래는 미영의 말대로 검색을 했다. 태블릿에 나타난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미래는 김지훈 박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같이 의사를 만나러 갔다.
4-6
미래는 김지훈 박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같이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회장은 이 태블릿이 예언서라도 되는 것 마냥 말하는데, 사실 이 내용이 미래를 예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 써진 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게 현실화되는 거 아닐까요? 그럼 이걸 예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미래는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믿으시나요?”지훈이 덤덤하게 말했다.
“뭐.. 그렇진 않아요”
김지훈 박사는 양자화 디스크 개발 후 플라이 어웨이와 기술 교류와 더불어 기술 고문도 맡고 있었다. 30대 중반에 단정한 머리를 하고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체크무늬 셔츠는 입고 있지 않았다. 라운드 티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하늘하늘한 몸집에 고집스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필요 이상의 말은 잘하지 않는 편으로 그의 주변엔 항상 침묵이 따라다녔다
“물리학 전공이신가요?” 미래는 정적을 깨고 말했다.
“네 고체 물리학 연구합니다.” 운전대를 붙잡고 앞을 응시한 채 대답하는 지훈.
“아~ 네 그렇군요.” 미래는 고체물리학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미영이 쓴 소설에서 지훈은 말도 많고 약간은 허술한 타입의 천재로 묘사되어 있었는데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중요 사건만 보고 세세한 것은 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미래는 태블릿을 흔들며 말했다.
“네, 그런가요” 역시 사교성이 떨어지는 대답이다.
미영의 소설 속 지훈은 일찍 여읜 아버지를 동경하며 존경한다고 묘사돼 있었다. 양자역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아버지는 연구에 미쳐있었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클라우드 서버에 남기고 떠났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아버지는 잘 살아 계시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어떻게 에둘러서 물어볼 방법을 찾기 위해 미래는 단어의 바다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훈이 먼저 말을 건네어 미래를 바다에서 꺼냈다.
“회사를 퇴사하셨다고 들었는데 어쩌다가 돌아오게 되셨어요?”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건 또 다른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는 20년 전 기자회견을 떠올렸다. 다시 그 정도의 큰 사건이 생길 것이며 자신이 이번에도 그 중심에 있을 수 있을 기대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파트 잔금을 마저 내야 하거든요.” 미래는 20년 전 집값을 떠올렸다. 그때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놓을걸..
“회장님이 제일 먼저 미래님을 찾으신 걸 보니 믿음이 확실한가 보네요, 아 그런데 호칭을 뭐로 하면 좋을까요?” 지훈은 여전히 앞만 보며 말했다.
“글쎄요.. CSO가 뭔지 알아요?” 미래는 옛 생각을 하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CSO요? Chief Science Officer, 최고과학책임자 말인가요?”
“아.. 그냥 실장이라고 불러주세요” 미래는 항상 실장이라는 직책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직함이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로 알게 되었다. 그 두루뭉술한 실장이라는 직책의 편리함을.
4-7.
치흠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간 미래과 지훈. 그는 약간 빈정대며 말한다.
“어이구 안녕하세요~ 두 분이 부부일리는 없으실 테고,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진료 보러 온 거 아닙니다” 지훈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일단 앉으시죠~” 치흠은 딱딱한 환자용 의자에 그 둘을 앉혔다.
미래는 치흠이 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는 걸 알아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회사를 고소하신 다고 연락을 하셨던데요”
“아, 플라이 어웨이에서 오셨구나~고소는 아니고 고발이죠.” 치흠이 말했다.
“네, 저희는 진상조사를 위해 나왔습니다.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지훈이 말했다.
“지금 세상이 이런데 말이에요. 벌써 십수 년 전부터 출산율 때문에 난리인데 당신네 회사가 불임을 병처럼 퍼뜨리고 있다니까요!” 치흠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증거로는 뭐가 있죠?” 지훈이 나름대로의 의문점을 담아 자기 딴에는 담백하게 물어봤다. 미래는 치흠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이제 김박사에게 말을 시켜선 안 되겠다.
“이쪽 분야에는 정치흠 박사님이 가장 명망이 높으시니 고견을 여쭈러 온 거죠” 미래는 ‘MD. PhD 정치흠’이라고 쓰인 명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는 잘 먹혀들었다. 치흠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의 무용담부터 그간 자신이 해왔던 일들의 위대함과 성과와 더불어 현재 병원장에 대한 불만까지.
끝이 없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치흠은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둘에게 푹신하고 편한 소파에 앉기를 권했고 작은 냉장고에서 음료도 하나씩 손에 쥐어주었다. 그저 불만을 토로하고 말을 할 곳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불임과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의 상관관계를 알아낸 방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때 슬쩍 건넨 거대한 (정말 구시대적이지만 아직도 잘 먹히는) 돈가방 때문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셋이 동의한 것은 불임과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으나 하나같이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이렇게 막힐 때는 예언서에라도 기대어봐야지. 미래는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지훈의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분기점을 선택 혹은 입력하라고 나와있었다. ‘돈가방을 받음’이라고 입력하자 그에 따른 예상되는 시나리오가 여러 개 나왔다. 그중 그럴싸해 보이는 몇 가지 시나리오 속에는 지훈의 아버지가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나와있었다. 죽은 사람이 알려준다고? 아니, 아직 지훈의 아버지의 생사 여부는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 어쨌든 미래 이 예언서가 시키는 대로 물어보기로 했다.
“저, 혹시 김박사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세요?” 미래는 이야기의 맥락 이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정면으로 돌진하는 방법을 택했다.
“연구자이셨습니다. 이론물리학자이셨죠.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지훈은 담담하게 말을 했고 치흠과 미래는 이를 이어 갈 말을 찾지 못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지훈의 말을 들은 치흠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20년 전, G병원의 중환자실. 작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인턴생활을 시작한 치흠이 외과 중환자실에서 섬망이 온 노인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침상에 누워 각종 전선과 수액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연구원 A의 곁에는 어린 날이 지훈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서있었다. 그 당시 주치의였던 병원장이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고 지훈과 그의 어머니에게는 깊은 슬픔이 내려앉았다. 치흠은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앉아서 그 들을 바라봤다. 이내 아이와 어머니는 중환자실 밖으로 나갔고 연구원 A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저는 그때 병실 밖에서 보고 있었어요” 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 그때 그 환자의 아들이셨군요!”
“네?”
“그때 제가 중환자실 인턴 생활 할 때였거든요.”
치흠을 비롯한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연구원 A는 사망을 했고 그 뒤 주치의는 지훈과 그의 어머니에게 상황 설명을 하러 떠났다. 치흠은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연구원 A의 마지막 순간은 치흠의 뇌리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때 무슨 말은 전하고 싶어 하셨던 거 같은데.. 자꾸 거울을 가리키면서 자신의 손을 비춰보였거든요. 무슨 뜻이었을까요?”
치흠의 말을 들은 지훈은 부리나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고 작은 모니터 속에 빠져들 듯이 집중했다. 미래는 나체의 아르키메데스 모드에 돌입한 지훈을 보고 치흠에게 말했다.
“조금 기다리면 답이 나올 것 같네요.”
“거참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그땐 완전 어린애였는데” 치흠이 말했다.
“저기!” 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뭐 좀 알아냈어요?” 치흠과 미래는 지훈을 바라봤다.
“저기.. 와이파이 비밀번호 좀..”
치흠은 벽을 가리켰다. 그곳엔 와이파이의 비밀번호가 아주 작게 적혀있어서 지훈은 일어서서 벽으로 다가가 글자를 겨우 읽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지훈은 그의 아버지가 남기고 간 아카이브에 접속해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미래는 미영의 소설대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정말 예언서일까? 그런데 내가 지훈에게 아버지에 관해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았을 텐데. 그럼 내가 질문을 한다는 것까지 미리 소설 속에 들어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행해진 거라면? 질문을 한다는 상황을 내가 선택한 것이 맞는 걸까 아니면 필연적으로 이 선택이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원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지훈의 말이 미래의 복잡한 머릿속을 깨고 들어왔다. 지훈은 치흠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니까 잘 아시겠네요. 콘테르간 스캔들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광학 이성질체, 콘테르간 스캔들
원자들이 결합하여 분자를 형성할 때는 3차원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같은 분자식이라도 다른 모양의 3차원 입체구조 분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이들은 분자를 회전시켜 보아도 두 개를 겹칠 수가 없다. 이를 이성질체라고 하며 그중에서도 분자형이 거울상 대칭인 것을 광학 이성질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와 손바닥으로 구성된 손이지만 왼손과 오른손은 거울상 대칭인 것과 같다.(오른손을 거울에 비춰보자. 그럼 거울 속에는 왼손은 모양의 손이 보인다.)
1957년 서독에서 콘테르간(Contegran)이라는 제품이 출시되었다. 성분명은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로, 입덧 완화에 효과가 있어 많은 임신부들이 복용을 했다. 그런데 이 약을 복용한 산모에게서는 사지가 없거나 짧은 신생아가 태어났다. 이 부작용이 알려져 약이 판매 금지되기까지는 거의 5년이 걸렸고 그 사이 이 때문에 유럽에서만 8천 명, 전 세계에서는 1만 2천 명가량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이 탈리도마이드 분자는 R형과 S형의 두 광학 이성질체의 형태를 가지는데 이중 (R)-thalidomide는 입덧 완화의 효과를 보였으나 (S)-thalidomide는 혈관의 생성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어 태아의 혈관 생성을 억제하여 사지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극단 적으로 짧아지는 기형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 R형만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쪽 이성질체만 복용해도 간세포에서 다른 쪽 이성질체로 전환이 되어 어떻게 해도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4-8.
“그럼 그 수많은 콘테르간 키즈들은 지금 다들 어디 있을까?”
임원 중 한 명이 엉뚱한 말을 했고 임원들 사이에서는 술렁임이 잠시 일었다. 플라이 어웨이 회의실에는 임원 3명을 상대로 미래와 지훈이 상황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무실의 탁자는 육각형 테이블을 여러 개 이어 붙어 벌집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래는 벽에 발린 스크린에 발표자료를 띄워 놓고 있었다.
“그래서 수신기에서 사람을 재조립할 때 무작위적으로 이성질체 문제가 발생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성질체가 불임과 무슨 상관이 있죠?”정신을 차린 임원 중 한 명이 질문했다.
“체세포의 경우에는 계속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데 평생 동안 새로 교체되지 않는 세포가 있습니다.” 미래는 발표 자료를 다음 슬라이드로 옮긴다. 화면에는 난자의 발생과정과 거기에 관여하는 호르몬, 그리고 호르몬의 상호작용과 주기를 그래프로 그려놓았다. 각종 도식들의 등장으로 임원들의 집중력이 흐려짐을 간파한 지훈은 갑자기 재미없는 개그를 시작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한.
“플라스틱 키즈 아시죠?” 지훈은 개그의 운을 뗐다.
“당연하죠. 우리 회사에서 후원하는 아이돌 밴드잖습니까” 임원 중 하나가 답했다.
지난달에 있었던 플라스틱 키즈의 새 앨범(리메이크 앨범이다) ‘너에게로 텔레포트’의 쇼케이스 현장이다. 이가연(보컬, 17세), 강나연(베이스, 16세), 정다연(기타, 16세), 김하연(드럼, 20세)으로 구성된 4인조 걸밴드였다. 이들의 활동명이 가연, 나연, 다연 다음에 하연인 것은 ‘라연’부터 ‘파연’까지의 확장을 염두에 둔 회심의 작명 같은 것이었다.(플라이 어웨이의 자회사 플라이 어웨이 뮤직의 대표는 과연 어떤 센스를 가지고 있는 걸까..) 쇼케이스의 사회자로는 능글맞지만 젠틀한, 차갑지만 따뜻한 최고의 모순적인 MC 춘한설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한설 : “이번 앨범 타이틀 곡 너무 좋더라구요. 제목이 뭐였죠?”
멤버 모두: “‘너에게로 텔레포트’ 입니다아~”
한설 : “이거 리메이크 곡이죠?”
다연 : “네, 검정건반 선배님 노래를 이번에 저희가 부르게 되어 영광입니다아~”
한설 : “그래요 검정건반, 그런데 그 노래 하나만 내고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혹시 만나보셨나요?
나연 : “하하하~ 저희도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오. 너무 궁금해요오~”
한설 : “역시 비밀스러운 가수네요. 리메이크 허락은 받으신 거 맞죠?”
가연 :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한설 : “저기 카메라 뒤에 관계자 분들 눈빛이 흔들리는 데요오~~?”
방청객 : ‘폭소’
한설 : “이 노래가 20년쯤 전에 나온 거 같은데, 우리 보컬 가연양은 이 노래가 나왔을 때 몇 살이셨나요”
가연 : “아.. 저는 태어나기 전이라, 그땐 아직 아빠 쪽에..”
방청객 : ‘대폭소’
“아니 아직도 이런 재미없는 개그에 웃는 사람이 있더라니까요!”라고 말하고 지훈이 임원들을 쳐다보자 임원들은 급하게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 본론만 이야기하세요” 참다못한 미래가 핀잔을 주었다.
“네, 여기서 중요한 점은 20년 전에 우리 가연 양은 아빠 쪽이 아니라 엄마 쪽에 있었다고 해야 맞았어요. 정자는 고환에서 3개월이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만 17세인 우리 귀여운 이가연 양 유전자의 절반은 17년 하고 3개월 정도 전에 만들어져..” 지훈은 플라스틱 키즈의 팬인 모양이다..
“김박사님!” 미래는 지훈을 다시 현실로 끌고 왔다.
“아, 네. 20년 전에는 엄마 쪽에 있었던 이유는 난자는 태아 때 만들어진 뒤로 추가로 만들어지거나 교체되지 않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난자를 가임기 내내 하나 둘 배출하다가 모두 소진하고 나면 폐경에 이르는 거죠.” 지훈은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그래서 이성질체 문제를 겪은 난자는 기능을 상실하고 다시 복구되지 못하는 거죠. 이것이 불임의 원인입니다. 즉 기능을 상실한 (S)-난자가 원인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