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미영은 오랜만에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버스에 실려 창밖을 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익숙한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오래된 가게들은 다 바뀌고 새로운 건물들이 생겨났지만 왠지 모르게 전체적인 느낌은 그대로였다. 해외 어딘 가를 여행할 때 분명 처음 가보는 동네이지만 왠지 모르게 고향에 있는 내가 아는 그 길과 닮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바로 그때의 느낌이 났다.
미영의 고향은 인구가 50만쯤 되는 소도시였다. 학창 시절 중간고사를 마치고 시내로 나가면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2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항상 아래를 지켜보고 있었고 누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을 숨기기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소도시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어느 날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뒤 그 길로 고향을 떠났다. 소설가가 되는 것에 장소가 무슨 제약이 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쪽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동료가 될, 혹은 원수가 될 작가나 평론가들과 출판사는 모두 수도권에 모여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대도시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의 접촉도 잦을 수밖에 없다. 이벤트가 있어야 창작물이 나오는 법이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앉아서 SF를 쓰긴 어렵지 않겠나. 만약 어찌어찌해서 SF 소설을 썼더라도 하루키 급의 대 작가가 아닌 이상 편집자가 찾아 오진 않을 테고 결국 내가 그쪽을 찾아가야겠지. 산 넘고 물 건너 말이다. 그럴 바엔 그냥 보도블록 넘고 횡단보도 건너서 가는 게 훨씬 낫지.
미영은 핸드폰을 속 메신저를 켜 메시지를 보낸다.
미영: 다들 어디야?
건후: 가는 중
지인: 미안! 나는 5분 정도 늦을 것 같아 ㅠㅠ
건후: 과연 진짜 5분만 늦을 것인가
지인:...... 10분... 그런데 이번에 수인이도 와?
미영: 온다던데? 이방에 초대돼있는 거 아냐?
지인: 그렇긴 한데, 얘가 뭐 톡을 확인해야 말이지. 읽어도 답장도 잘 안 하고
미영: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 기다려보자
건후: 나는 곧 도착 좀 있다 봐
미영과 친구들은 고등학교 학창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며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하고 또 상실했었다. 그때의 그들은 하나의 선로를 함께 달렸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선로에 분기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서로의 선택이 달랐다. 어느덧 2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상대방의 선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미영은 오늘 그 선로를 거슬러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선로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에는 이미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자신을 반갑게 맞아 줄 것 같았다. 예전처럼 실없이 웃으면서.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한 미영은 가게의 문을 열었다. 갓 20살이 되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처음 갔던 (비공식적으로는 어느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가 혼자 운영하시는 막걸릿집에 기말고사를 치고 갔던 게 처음이다. 고2 겨울이었다) 술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세월이 멈춘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황토벽에 발린 흰 벽지에 잔뜩 적힌 낙서와 환기가 잘 되지 않는 탓에 주방에서 풍겨오는 식용유의 유증기에 눈이 살짝 따끔한 느낌까지. 아마 유증기의 습도를 잴 수 있다면 한 여름철 장마 때의 습도만큼 높을 것이다. 엄마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자기가 어렸을 때도 있었던 가게라고 했다. 저기 저 벽지 낙서 어딘가에 엄마의 낙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아는가, 엄마의 첫사랑과의 추억이 적혀있을지.
“오랜만이다!”
멀리서 어떤 남자가 미영을 불렀다. 꽤나 훤칠한 미남이었다. 아니다. 키가 크지 않으니 훤칠하다는 표현은 안 맞을 수 있겠다. 그냥 꽤나 미남인 사람이었다. 누구지? 미영은 머릿속에 저장된 사람들의 얼굴 정보를 잔뜩 끄집어냈다. 하지만 완벽히 매치되는 얼굴이 없었다.
“여전히 너만 제시간에 왔네”
목소리 정보를 조합하자 정답이 나왔다.
“건후! 오랜만이다~ 뭐야? 뭐 이렇게 변했어?”
“너는 그대로네”
미영은 건후의 건너편에 앉는다.
“오랜만에 왔는데 요 앞에 다 그대로 더라?”
“뭐래~ 다 바뀌었어~ 네가 아는 가게들 하나도 없을걸?”
“그런가? 잘 모르겠던데”
“요즘 오래가는 게 전혀 없어, 이 가게랑 너만 빼고”
건후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상하다. 내가 알던 건후는 이렇게 싱그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외모가 아니었는데.. 뭐, 못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는 아침에 일어나 머리 손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머리를 여러 번 다시 감는 일이 많아서 자주 지각을 하던 친구였다. 옷은 꽤나 잘 입는 편이긴 했다.
“너 혹시 꿰맸어?” 미영이 말했다.
“응, 자연스럽지?”
“언제 했어?”
“어제저녁에. 이거 하려고 5년간 돈을 모았지 후후. 어때?”
“응.. 정말 자연스럽네”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
텔레포트 용도로 개발되었던 장치는 암환자의 치료에 사용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가 갈수록 기술은 발전했고 간편화 되어 기기 보급률이 올라갔고,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미용 성형 분야에 쓰이기 시작했다. 심혈관 질환의 치료 및 예방을 위해 관상동맥 확장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약이 오히려 발기부전 치료제로 세상의 또 다른 빛이 된 것과 같이. 원리는 간단하다. 사람을 해체-전송-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암 덩어리를 배제하고 조립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지방이나 피부조직 일부를 빼고 재조립하면 날씬한 몸과 예쁜 눈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암치료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이미 거대 기업이 된 플라이 어웨이에게는 자신의 기기를 성형 용도로로 승인받기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이번에는 초유기체를 이루는 개별적 개체의 희생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위상수학적 문제는 해결을 못했기 때문에 ‘꿰매는’ 단계는 꼭 필요했고 이 때문에 회장이 밀고 있는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라는 지극히 과학자스러운 명칭은 잘 사용되지 않았고 “꿰맸어?”라는 말이 텔레포트를 이용한 성형을 했냐고 물어보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성형을 할 수 있었고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성형을 하지 않은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성형의 정도가 심한 사람은 아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바뀌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시술을 한 뒤에는 반드시 신분증 갱신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어떤 낭만적인 인문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외모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미의 기준이 바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맑음을 더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2만 년 전에 만들어진 풍만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현대의 미의 기준에 맞지 않듯 현대의 날씬한 비너스도 곧 과거의 미의 기준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낭만적인 인문학자는 누가 봐도 멋지고 (꿰매지 않고도) 예뻤기에 그녀의 말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하지만 세상 예측이 그리 쉬우랴.
2-2.
미영과 건후는 술잔을 부딪힌다.
“지금은 눈 코 입만 한 거야?”
“응, 얼굴 윤곽은 다음에 하려고”
“또 몇 년은 돈을 모아야겠네?”
“응 그렇지. 나머지 다 꿰맬 때까지는 밖에 잘 안 나다니려구”
“왜? 그래도 꽤 멋있게 잘 됐는데? 자랑하고 다녀야지.”
“너 그거 몰라? 이거 얼굴에도 계급이 있어”
“계급?”
“너는 여전히 이런데 관심이 없구나”
건후는 맥주를 들이켜고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스럽고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게 사람들이 성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다들 예쁘게 하고 싶겠지. 자기 취향에 따라”
“결국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비슷하잖아. 연예인을 봐도 강아지 상 이라느니 고양이 상 이라느니 하면서 예쁘다고 생각하는 모습의 분류가 나눠진단 말이지. 예쁘다는 건 어쩌면 공통된 취향 같은 거야.”
“그럼 다 비슷비슷한 얼굴이 될 거 아냐.”
“그렇지 요즘 반짝반짝하는 동네에 가보면 다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많잖아”
“그런데 희소성이 있어야 예쁜 거 아니야? 그럼 개성 있는 얼굴이 각광받게 되는 거 아닐까?”
“다들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이게 한두 푼 하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티를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니까? 재력을 뽐내는 수단 같은 거지.”
“아... 그렇게 되나.. 그럼 너는 재력을 뽐내다 말았네?”
몸을 뒤로 젖히며 인상을 찡그린다. 이렇게 정곡을 찌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했다. 사실 예전부터 건후는 나에게 자주 찔렸다. 마음속을 열어보면 내가 만든 흉터가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아!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그래 그래. 알지 알아. 그래.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래서 얼굴 다 손보기 전에 나다니면 쪽팔리잖아”
2-3.
미영은 건후의 말을 들은 뒤 생각에 잠겨 그 뒷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일종의 직업적 습관 같은 건데 이런 쪽으로 꽤 재능이 있다고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비슷한 외모가 많아지기 시작하자 최상류 층의 사람들이 플라이 어웨이 메디컬과 결탁해 특정 외모는 자신들만 쓸 수 있도록 계약을 했다. 자신들이 독점한 외모를 하나의 계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품 옷이나 가방보다도 훨씬 더 확실하고 언제나 자신의 계급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으로 얼굴만큼 적격인 것도 없었다.
이런 풍토는 점점 퍼져 사회 경제적 계급에 따라 외모가 특정이 되어갔다. 부촌에 가면 다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개개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키 밖에 없었다. 송수신 과정에서 신체 일부를 빼먹는 건 가능해도 애초에 전송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재조립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세상은 키를 구분하는 단위가 점점 세밀하게 나타났고 키를 물어보면 다들 소수점 셋 째자리까지 말을 했다. 이름보다 숫자로 사람을 기억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A타입 얼굴 178.215cm’라고 말하면 그게 누구 인지를 특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웹상에서 더욱 만연했는데, 일단 얼굴 타입을 구분해 그것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계급을 나타낼 수 있었고 키를 말하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사람의 내면과 영혼을 언급했던 그 멋진 인문학자의 예측이 완전히 틀린 것이다.
하지만 최상류 층의 생각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하찮은 예상을 더 뛰어넘는다. 가장 적은 수의 사람을 보유하고 있는 얼굴 타입인 ‘apex 타입’은 얼굴형 계의 최상위 계층으로 불린다. 어느 날 이들은 무시무시한 발표를 하는데
- apex 타입은 이제부터 얼굴형 뿐 아니라 키도 포함합니다. 모든 키는 타입 내 사람들 중 가장 작은 사람의 키로 통일합니다. (남자 163.1752cm, 여자 151.9836cm) -
이제 키로 인해 발생한 알량한 자존심 싸움이 제거됐다. 최상류 층 사람들은 정말 남다르긴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렇게 되자 apex 타입의 사람들은 같은 성별이라면 개개인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입을 꾹 닫고 있다면 어떻게 봐도 다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현상이 한세대를 넘어가자 최상류 층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하나의 집단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나와 같은 외모의 사람들뿐이었고, 다른 집안의 자식들조차 본인들 자식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부모 자식은 구분이 되는데, apex-a, apex-b 이런 식으로 아형이 존재했다.) 결국 나와 너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자신과 남을 동일시 하면서 자기 자신이라는 객체 하나의 희생에는 고통을 받지 않았다. 그 결국 최상류 층 집단 전체가 하나의 초유기체처럼 변화하여 그 막대한 연결성으로 세상을 쥐고 흔들었다. 이런 독재는 늘 그렇듯 변질되고 세상을 불행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메시아는 끝없이 나타난다. 꿰매기 시술을 받지 못하고 사는 저소득 층에서 우연히도 외모가 apex-c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를 존재를 알아챈 레지스탕스는 그를 유괴하여 혁명군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키가 점점 자라 163.1752cm가 되었을 때 초유기체화가 된 최상류 층의 무리로 투입하여 그들의 근원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2-4.
“오랜만이다!”
쾌활한 지인의 목소리에 미영은 이야기에서 빠져나온다.
“아휴.. 얘 또 옛날 버릇 나왔어. 사람 앞에 두고 혼자 멍하니 망상하는 거” 건후가 투덜거렸다.
“여전해서 보기 좋네” 지인은 미영의 옆에 앉는다. 건후는 지연에게 맥주를 따라준다.
“잘 지냈어?” 지연이 미영에게 물었다.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정말 진심으로 잘 지냈는지 물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냥 뭐 그럭저럭”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은 뭐야?”
“아, 좀 복잡한데...”
“그럼 제목은 뭐야?”
“음..” 문득 미영의 머리에 다음 단어가 스친다. “플라이 어웨이”
“엥? 거기서 청탁이라도 받았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수인이는 언제 온대?”건후가 말했다.
“몰라, 늦게 라도 오겠지” 지인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요즘 연락 참 안되더라” 건후가 말했다.
“남자친구 생긴 거 아냐? 걔 보통 남자 생기면 연락 안 되잖아. 그전에 말이야, 응? 최근에 헤어진 그 사람 만났을 때도 말이야” 미영이 말했다.
“아, 그래 그때 그 변태?” 지인이 말했다.
“그래 그때도 그 남자한테 빠져가지고 말이야, 우리말도 안 듣고 말이지” 건후가 말했다.
“그 변태 손톱을 모았다 그랬던가?” 미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정확히 매주 월요일에 손발톱을 자른 다음에 길이랑 상태를 확인하고 그걸로 자기의 건강을 체크한다고 그랬지. 집에는 평생 자른 손발톱을 유리병에 모아놓고 말이지.” 건후가 말했다.
“아 그래! 그랬지. 게다가 그 유리병이 로코코 스타일의 굉장히 엔틱하고 예쁜거라 더더더 소름이 돋았었지” 지인은 몸에 소름이 돋는 듯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걔도 참 남자 보는 눈이 없지 그래, 어디서 그런 놈이랑 엮여서 말이야” 미영이 말했다.
“근데 남자 보는 눈은 얘도 참 없어” 건후는 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건후를 노려봤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래.. 하.. 나도 말이야 참.. 에잇 짜증 나!!” 지인은 짜증을 내며 맥주병을 들고 자기의 잔에 콸콸 따른다. 하얀 거품이 용암이 터지듯이 솟구쳐 오른다. 미영은 지인의 폭발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가 짜증의 이유를 물어봤지만 선문답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조만간 꿰매러 갈 거야. 제일 싼 걸로”
*또 다른 해결되지 않은 위상수학의 문제
텔레포트가 미용 성형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기기를 통해 전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장내미생물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외부의 물질이 더 있었던 것이다.
**태아
사람의 면역체계는 외부의 물질을 공격하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태아는 엄밀히 말해서 외부물질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10달 동안 외부 물질을 품고 키우다가 다시 외부로 내놓는 것이다. 태아는 산모의 몸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태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산모의 면역 체계는 왜 태아를 공격하지 않는가. (산모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영양 상태가 불량하면 배아가 유실되어 흡수되긴 한다. 이런 특별한 상황은 배제하고 일반적인 건강한 산모의 경우를 알아보자)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성이 임신을 한 뒤 다량 분비되는 여성 호르몬이 흉선을 자극해 조절 T세포를 만들어 내고 이것이 태아에 대한 모체의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것이 한 기전이라고 생각된다.
위상수학적으로 볼 때 위장관계가 외부라면 자궁 내부도 외부다. 만약 전송 과정에 태아가 발견되면 기계는 이를 외부 물질로 인식해 배제해 버리고 전송한다. 이것은 안전한 낙태를 의미했고, 심지어 태아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작든 크든 외부 물질인 건 매한가지니까. 하지만 당연히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고 오로지 낙태를 목적으로 기기를 가동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간단한 미용을 위해 텔레포탈 플라스틱 서저리를 사용했을 때 고객이 말하지 않은(혹은 진짜 몰랐을) 임신 여부는 당연히 알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카탈로그 상에서 가장 싼 시술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2-5.
요약하자면 지인이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다. 지인이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다. 정말 예전부터 들려온 닳고 닳은 이야기를 내 친구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미영의 뇌는 위로의 말을 찾아 의식 속을 헤매었고 어떻게든 적당한 말을 찾아 지인에게 해주었다. 과연 그것이 얼마나 지인에게 영향을 끼쳤을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는 옆에서 지지를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렇게 그날 모임에서 가장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지인이가 등극한 줄 알았지만 가장 늦게 나타난 수인이의 사연이 그렇게나 기구할 줄은 몰랐다.
지인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실컷 그의 전 남자친구를 히틀러 급의 전범만큼 나쁜 놈으로 몰아갈 때쯤 수인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외모가 예전보다 달라져 있었다. 건후처럼 성형을 한 건 아니고 고생을 해서 초췌해진 모양새였다. 그리고 푸석푸석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오랜만이다, 그동안 뭐 했냐는 등의 사교적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인이는 연거부 술잔을 비웠다. 웃으면서 대화를 하는 듯했지만 무언가 깊은 고민이 있어 보니는 눈빛을 보고 있으니 궁금증이 차올랐지만 미영은 조급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빈 술잔에 충실히 술을 채워주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수인이 말했다.
“야.. 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 기억하지? 그..”
“변태?”
“그래, 그 변태 말이야. 헤어지자고 말했더니 매일 밤 집 앞으로 찾아오더라고. 어두운 가로등 밑에 숨어서 말이지.”
“신고라도 하지 그래?”
“했지.. 그래서 결국 겨우겨우 헤어지고 얼마뒤에 다른 남자를 만났어”
“역시! 여전히 인기 많아 수인이~”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너무 잘 맞는 사람이었거든. 나랑 취향도 거의 같다시피 할 정도로 비슷하고 사는데도 우리 동네였어. 게다가 외모도 내 이상형에 부합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 소울메이트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역시, 그래서 연락이 잘 안 됐구나. 우리한테는 언제 소개해줄 거야?”
“그게 말이지.. 몇 달 전 일요일에 우리 볼링 치던 날 기억나?”
“응~ 내가 이겼지 후후”
“그날 내 손톱이 깨졌잖아”
“그래 나한테 볼링도 깨지고 손톱도 깨지고. 후후후”
수인은 말을 멈추고 가만히 건후를 바라봤다. 건후는 왜 이렇게 신이 났을까.
“야, 얘한테 술 좀 그만 따라줘”
“여튼 그래서 그다음 날에 내가 손톱이 깨져서 기분이 다운돼 있으니까 남자친구가 네일샵에가서 손톱관리를 받자고 하더라구”
“진짜? 남자가 네일 샵 가잔 말을 해? 우아.. 진짜 소울메이트”
“그래서 내 단골 네일샵가서 손톱 관리받고 기분이 좋아졌지. 그런데 그날 실장님이 서비스로 남자친구 손톱도 해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기분 좋게 받고 나왔지. 그리고 이틀뒤에 실장님한테서 연락이 왔어.”
2-6.
수인은 ‘투모로우 네일 샵’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없이 한산했고 구석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실장이 수인을 반겼다. 둘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인은 실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예전에 중학교 같은 반 적당히 친한 동급생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쭈뼛거리며 어떤 말을 하기를 주저했던 그 상황과 비슷했다. (그 말의 내용은 나의 소울메이트라며 꼭 붙어 다니던 단짝이 사실은 뒤에서 나를 험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수인씨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라고 운을 떼는 실장을 보고 있으니 수인은 마치 자신이 범죄 스릴러 속의 한 등장인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에 도둑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딴 건 하나도 안 훔쳐갔는데 말이야..”라고 말을 하는 실장을 보고 있으니 수인은 마치 자신이 미스터리 스릴러 속의 한 등장인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장은 범죄 당일의 CCTV 녹화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는 어떤 남성이 네일 샵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한 밤중이라 어두운 가게 안을 핸드폰 불빛 하나에 의지하며 고개를 처박고 거의 네발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쓰레기통을 열심히 뒤졌다. 마치 아주 작은 소중한 무언가를 찾는 듯이 꼼꼼하게. 그 뒤로도 바닥을 거의 기어 다니던 남자는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탓인지 우두커니 일어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결심을 한 듯이 가게의 전등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갑자기 환하기 밝아진 영상은 잠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카메라는 감도를 자동으로 조절하여 점차 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본격적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이었다. 그리고 마침에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쓸어 담아 가지고 온 지퍼백에 조심스레 담는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다. 그때 실장은 화면 재생을 멈춘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보인다.
“수인씨, 이 사람 자기 남자친구 아니야?”
2-7.
‘손톱이 꽤 길었네, 집에 가면 잘라야겠어’
고향을 떠나 다시 G시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미영은 자신의 손톱을 보며 생각했다.
수인과 헤어졌다는 변태 남자 친구는 상상 이상으로 더 대단한 변태였다. 네일 샵 사건 이후로 이루어진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이별 후 스토커 기질도 추가한 그 변태남은 당장 플라이 어웨이 메디컬로 찾아가 얼굴 성형을 했다. 수인의 이상형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인 척하며 수인을 다시 만난 것이다. 쉽게 말해 수인과 두 번 사귄 거다. 첫 번 째 사귈 때 자신의 손발톱 건강과 함께 세세히 기록한 수인에 대한 데이터들은 두 번째 사귈 때 그가 수인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약간 과장을 보태면 10pt, 바탕체, 줄간격 160%로 쓰인 A4용지 50장-양면 인쇄 돼있었음-, 노란색 포스트잇 1kg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네일샵에서 손톱을 자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손톱을 다시 회수하러 밤을 틈타 가게에 잠입하지 않았다면 그 변태남은 소울 메이트로 계속 여겨지고 있었겠지.
소울 메이트와 스토커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체크하는 건강인과 손톱을 모으는 변태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송되지 못하고 남겨진 태아는 버려진 것일까 단순히 분리된 것일까?
미영은 차장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최근 미영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쌍꺼풀 수술을 했다. 칼과 실을 써서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정도면 꽤 잘된 거 같은데 말이지.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만족스럽다.
친구들과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미래에 벌어질 만한 온갖 갈래의 이야기들의 미영의 머릿속에 가득히 들어찼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미영이 탄 버스는 거대한 벌의 둥지 같은 플라이 어웨이 본사 건물 앞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