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그 끝없는 바보스러움에 대하여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작농 파홈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느날 땅을 헐값에 판다는 소식을 듣고 땅주인에게 찾아갑니다. 땅주인이 조건은 간단했습니다. 해가 뜨면 걸어 간만큼의 땅에 표식을 남기고 해가 지기전까지 돌아오면 파홈이 걸어온 만큼의 땅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가 지면 모두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소작농 파홈은 욕심을 내서 갈수있는 만큼 멀리 걸었습니다. 이제 그는 해가 지기전까지 돌아 가야 하는데 서두르지 않으면 그 넓은 땅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는 있는 힘껏 달려서 돌아왔지만 너무 무리해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푼 마음으로 달렸던 그 넓은 땅 단 한평의 공간도 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죽음을 맞이한 그의 육체가 필요한 땅은 어느 정도 였을 까요 . 그가 죽어서 하락된 땅의 넓이는 단 3아르신(2미터)였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는 시대를 너머 관통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허무한 종말을 짧은 예화를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21세기 지구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도 벌어지더군요 . 어느날 회식자리에서 들었던 어이 없는 건물주의 죽음도 생각이 납니다.우리사회 어디에서도 있을 법한 일 처럼 건물주였던 노인이 세입자와 월세를 놓고 크게 다투었던 모양입니다.
집세를 올려 받으려던 집주인은 세입자와 심하게 다투다가 갑자기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씁씁했던 생각도 납니다. 사람의 수명은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수 없다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너무 짧은 식견입니다. 핏대를 세우면서 까지 다툴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수명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없는 재산아닌가요. 인간은 그런면에서 보면 참 무지합니다. 때론 냉혹하기도 하고요. 그 남은 재산은 영문도 없이 온전히그의 아내나 자식에게 돌아 갔을 것이니까요.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유산의 상실을 더 오래 기억한다 " 고 했습니다. 유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크게 위로를 받을지도 모를일입니다.
자신의 죽음이든 가족의 죽음이든 가장 큰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물론 자신의 죽음의 의미는 생전에 깨닫고 실천을 한다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남은 여생을 값어치 있게 쓸려고 합니다. 가족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당혹감과 충격을 줍니다. 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바로 아침까지 함께 식사를 했고 주말 일정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부모가 또는 배우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했는데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아들 잘 갔다”와 하는 인사를 들었는데 바로 몇시간후 돌아가신 모습을 목격하고는 세상이 무너지는 감정을 느꼈다. 응급실로 갔다가 사망 판정을 받고 다시 부검하는 과정을 겪는 과정도 너무 힘들었지만 아들이 사준 속옷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관속에 누워 있는 어머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너무 허무 하더군요.
단돈 십원도 가져가지 못하는 삶인데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며 불나비처럼 돈을 향해 그리고 안락함만을 행해 달려가고 있는 인생은 아닐런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