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밭 정리
아침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가을의 문턱에 와 있나 봅니다. 장마철 내내 우기로 가득했던 내 마음에도 상크름한 바람이 불어와 새뜻해집니다. 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도 쾌청한 햇볕에 조금씩 희망을 걸어 놓는 시간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아내가 아침 식사 후에 후식으로 내놓은 포도에 달콤한 맛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전쯤 포도를 처음 땄을 때 맛은 새콤함이었습니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보던 포도알보다 훨씬 작았고 달콤함보다는 새콤함이 강렬했습니다. 유튜브에서 본대로 될성부른 포도알에 하얀 봉지를 씌워 벌레를 방지했건만 열매가 달린 건 봉지를 씌우지 않은 쪽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이유에 대해 심층 토론을 벌였지만 ‘알 수 없음’으로 무책임한 결론을 냈습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 포도와 봉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굳이 모른 척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처음의 새콤함이 일주일 숙성을 거친 뒤에 달콤함으로 변했으니 우리는 비로소 ‘새콤달콤’의 진정한 뜻을 혀로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텃밭에는 포도나무 말고도 유실수가 많은데요, 참담한 결실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아로니아 나무는 작년 수확량의 반의반도 열리지 않았고, 블루베리에는 고작 세 알만 열렸습니다. 블루베리는 현재 무성한 잎사귀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게 다 거름을 적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애써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는 비겁한 자의 알리바이라고 그동안 떠들어 댔는데 그 화살이 나에게 박히고 말았습니다. 내년에는 거름도 듬뿍 주고 가지치기도 제대로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했지만 사실 가지치기를 어찌해야 하나 난감합니다. 아내는 쓸데없이 다른 유튜브 보지 말고 농사 관련 유튜브나 보라고 합니다.
“여보, 농사 정보 알려주는 유튜브 보고 공부 좀 하세요. 가지치기하는 거 다 나오잖아요. 쓸데없이 정치 같은 거 보지 말고요”
하긴, 정치 유튜브는 농사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내가 제일 자주 보는 TV 채널이 NBS 농업 방송입니다. 나도 덩달아 농업 방송을 보는데 은근 재미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아 과잉의 느낌을 받는데, 농업 방송에서 하는 ‘사노라면’ ‘나는 농부다’ 같은 프로를 보면 리얼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고 소박한 느낌입니다. 오히려 소소한 농사 정보를 얻을 때가 많고요. 아무튼 아내는 괴산댁답게 전원일기를 애청하고 농업 방송을 즐겨봅니다.
오늘은 그동안의 숙원과제인 옥수수밭 정리입니다.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서 오래도록 옥수수대가 밭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을 갈아엎고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저분하게 널려진 옥수수 대와 뿌리를 제거하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도 제거해야 합니다. 처음 옥수수 모종을 심을 때 여린 새싹 같았는데 대나무처럼 죽죽 자란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사랑도 물과 햇볕만으로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사랑 숲으로 가득해지겠지요.
다행히 옥수수 대는 대나무 마디처럼 단단하지 않고 마른 볏단처럼 푸석푸석합니다.
수레에 한가득 담아도 무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옥수수 뿌리는 문어발처럼 대지를 한껏 움켜쥐고 있어 뽑기가 쉽지 않습니다. 맨주먹으로는 절대 안 뽑힙니다. 세상일 중에는 맨주먹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호미로 주변 흙을 퍼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낫으로 찍어 올리는 신공을 보입니다. 게다가 낫의 등으로 흙을 털어내는 마무리까지 빈틈이 없습니다. 빈틈이 많은 나로서는 경탄할만한 일이지요.
잡초는 어김없이 무성하게 자라있습니다. 그리움도 잡초처럼 무성해지기에 사람들은 가끔 벌초를 하나 봅니다.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여행을 가고, 일에 몰두하고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움을 벌초합니다. 당신의 벌초는 무엇인가요?
나는 장부답게 수레에 옥수수 대와 옥수수 뿌리 그리고 잡초까지 3종 세트를 모아 텃밭 너머 국유지 빈터에 버리고 옵니다. 우리 텃밭 옆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국유지가 있어 그곳에 잡초더미를 버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잡초더미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졌지만, 그걸 관찰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아는 척 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우리 집 노동은 테일러 시스템에 근거해 분업하고 하고 있습니다. 가령 아내가 요리 전담이라면 나는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전담이듯이 농사일도 아내는 수확 담당이고 나는 잡초 뽑기 담당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분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요, 함께 하는 것도 많습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술 마시고, 같이 TV 보고, 같이 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