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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Feb 20. 2023

미선로 교동길에서 30

이랑만들기

    

며칠 째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모처럼 비가 그쳤습니다. 산마루에 피어난 구름꽃을 바라보며 하루의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늘의 미션은 밭 일구기입니다. 김장 배추를 심을 밭이지요. 우리 텃밭은 경사가 져서 검은 비닐을 씌우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랑과 이랑 사이의 고랑 폭도 좁아서 더욱 불편하네요. 우리는 평탄화 작업을 하고 이랑 네 개를 세 개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 일을 트랙터나 관리기를 사용하면 손쉽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장비가 있을 리가 없는 우리는 삽과 호미만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끝없이 바위를 산꼭대기에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삽질을 반복했습니다. 이랑 네 개를 세 개로 바꾸는 작업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쓸데없는 일을 할 때 ‘삽질하네’라고 이야기하지만, 삽질이 얼마나 쓸모있는 일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무념무상으로 반나절 삽질하다 보면 새로운 세상이 연출됩니다. 같은 동작으로 열심히 위쪽의 흙을 퍼서 아래쪽으로 던집니다. 쌓인 흙무더기를 봉긋하게 다듬어 이랑을 만들지요. 내가 대충 만들어 놓은 이랑을 아내는 호미로 포슬포슬하게 다듬습니다. 삽과 호미만으로 새로운 이랑이 만들어집니다. 그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면 밀레의 만종처럼 신성해 보일 것입니다.      

아내가 고랑에다 부직포를 깔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네요. 


“여보, 여기다 부직포를 깔면 잡초도 안 생기고 푸딩이가 와서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아요”

“굿! 푸딩이를 집에 가두어 놓으면 계속 짖을텐데 차라리 여기서 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게다가 잡초 걱정도 사라지고 완전 굿이예요.”

“푸딩이를 부직포 없는 밭에 무방비로 풀어 놓으면 온몸이 새카매지고 털에 벌레가 붙잖아요”

“맞아요. 덕배네 고추밭에 부직포가 깔려있는데 그곳에서 푸딩이가 잘 걸어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요. 굿 아이디어입니다!”

나는 엄지를 세움으로 강한 긍정을 표시했습니다.


다행히 전주인이 두고 간 부직포가 있었습니다. 부직포가 오랜 세월 사용해서 헐고 낡았지만, 그런대로 사용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배추밭에 부직포를 깔았습니다.     

김장용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거름과 비료를 담뿍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봄에 감자를 심을 때도 거름과 비료가 충분치 않았는데 제법 알이 굵은 감자를 수확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도 충분히 거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냥 믿어 보기로 했지요. 햇볕과 흙이 좋은 이곳 괴산 땅에서는 농작물이 잘 자라나 봅니다. 저도 영양제 복용하지 않고도 나름 건강하게 잘 지내는 걸 보면 배추도 그러하리라 믿음을 가져봅니다. 내가 믿음을 갖는 것은 걱정을 지우기 위한 일종의 정신 승리법입니다.     


반나절의 노동을 마치고 나서 몸무게를 재보니 무려 800g이 빠졌습니다. 에이, 설마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진실입니다. 다이어트에 삽질이 좋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삽질 다이어트’라는 제목으로 유튜브를 만들까 잠시 고민도 해봅니다. 동작 별로 살 빠지는 부위를 설명하고 시범을 보이는 거지요. 과학적으로 근거는 없지만 그럴듯한 이론도 곁들여가면서 말입니다.     


이랑 세 개를 만들고 부직포까지 깔린 모습을 보니 얼른 배추 모종을 심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젖은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부챗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땅이 엷은 갈색으로 변해있습니다. 오후 반절을 기다린 후, 해 어스름 무렵 배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간격을 맞추기 위해 호미를 이용해 일정하게 심었더니 삐뚤삐뚤하지 않고 오와 열이 가지런합니다. 호미를 자처럼 사용하는 테크닉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떠오른 기술입니다. 주변 지인들이 내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이 사람이 제대로 할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조언해 주는 걸 서슴지 않지요. 내가 이랑을 만들고 모종을 심는 모습을 보면 당황할 것이 분명합니다. 엄청난 배반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종 심기는 해가 진 뒤에도 이어졌는데요, 모기의 급습을 예상치 못해 엉덩이에 일곱 군데나 물리는 대참사가 빚어졌습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엉덩이가 가려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임에도 억지로 참고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늦여름 저녁 농사는 모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해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네요.     


일을 마치고 난 후 샤워하고 나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그야말로 천상의 술입니다. 술잔을 들고 정원에서 캠핑용 의자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봅니다. 별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셔본 적이 있나요? 도시의 주점에서는 불빛 때문에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요. 마을의 가로등만 흐릿하게 빛나는 시골의 밤하늘은 총총한 별자리가 가득합니다. 그 별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보람찼다고 건배하는 순간, 우리 가슴에 별빛이 흘러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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