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38년만의 기록적 폭우였다고 한다. 괴산 댐이 월류하고 마을 사람들이 대피하는 뉴스가 온종일 나왔으니 지인들의 걱정스런 안부 전화가 줄을 이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야 지대가 높으니 별 걱정을 안 했겠지만, 괴산으로 귀촌했다는 소식만 들은 친구들은 괴산이 한 동네인 줄 알고 걱정했을 것 같다.
괴산은 발전이 느려 인구 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크기가 작은 군은 아니다.
괴산 댐은 산막이 옛길로 유명한 칠성면에 있다. 우리 집은 칠성면 옆 장연면이다. 장연면도 지대가 낮아 대피한 주민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칠성면과는 떨어져 있어 괴산 댐이 월류한다고 해서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
어제는 비가 소강상태여서 아내랑 달천강 주변을 걸었다. 강을 건너가는 다리가 유실된 곳이 있는데 그 잔해가 끔찍해 보였다.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을 보니 무섭기도 했고 괜시리 마음이 겸허해졌다. 혹시 내가 막 살아서 이상기후를 초래하는데 일조했고 그 결과로 장마가 이리 무서워졌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두메 산골이어서 거친 비바람에 인터넷이 끊겼다. 당근 TV도 안 나온다. 목금토일 4일 동안 인터넷 접속도 못하고 TV를 안 보니 시간이 너무 천천히 갔다. 데크에 나가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는데 2시간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냥 멍 때리면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공간 개념도 흐려지는 것 같다. 그나마 강아지와 고양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반려견과 반려묘가 내 삶의 동반자라는 사실이 찐하게 와 닿았다.
문득 전기가 없던 시절 조상들은 뭐하고 지냈을까 생각해보니 지금 기준으로 너무 무료했을 것 같다. 달과 함께 술에 취해 한시를 읊조리는 수 밖에. 그것도 양반의 일일 것이다. 머슴으로 태어났으면 캄캄한 밤에 뭘 해야 하나...
4일 동안 비는 내리는데 문명과 고립되고 아내와 단 둘이 온종일 같이 있는데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