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촌부가 된 최선생 Jul 23. 2023

상견례


아내가 거울 앞에서 분주했다. 옷의 기능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던 아내가 평소와 다르게 무슨 옷을 입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큰 딸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는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상견례 자리에 입고 나갈 옷의 선택 앞에 며칠 전부터 진지했다. 충분한 토론 끝에 선택한 옷을 입고 토요일 오후라 막힐지 모른다면서 서둘러 나섰다.



장소는 큰 딸 해랑이와 예비 사위 정욱이가 정했다. 이런 거 정할 때 어른은 간섭하면 안 된다. 공덕동에 있는 분위기 좋은 중식 레스토랑이다. 데이트할 때 한번 가봤는데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우아해서 상견례 장소로 점찍어 두었단다. 먼저 도착한 우리 가족이 8인용 테이블에 일렬횡대로 자리를 잡았다. 옷걸이를 사돈 가족이 편히 사용하라고 우리 가족은 외투를 의자 뒤에 정갈하게 걸쳐 놓았다. 창밖을 내다보면 레스토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우리 가족은 약간 긴장한 탓인지 호들갑스럽게 대화하면서도 틈틈이 통로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상견례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서 아침부터 긴장했다. 나보고 알아서 이야기하라고 하면서도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아빠가 술 한잔하고 오바할까봐 딸들도 염려하는 눈치이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호방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예비 사위는 진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곰살맞게 먼저 이야기를 하는 편은 아니다. 우리 딸 해랑이도 싱그럽게 미소짓고 사분사분 말하지만 역시 이야기를 주도하지 않는 성격이다. 오늘의 만찬은 아무래도 내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사돈 가족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사돈은 울산에서 차를 가지고 오셨는데 수원부터 막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어색한 자리에서는 그날의 교통상황이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난하다. 서울의 주말 도로는 여전히 막혔고 겨울 끝자락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좋은 음식에 애주가로서 술이 빠질 수 없다. 무난하게 연태주를 시킬까 하다가 조심스럽게 백주를 권했더니 흔쾌히 좋으시다고 했다. 사실 사돈 어른은 중국에 여러 차례 출장을 다녀오신 적이 있어 중국 백주에 대해 전문가 수준이었다. 나도 몇 년 전 하얼빈 갔을 때 백주의 맛에 푹 빠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백주는 그윽한 향과 깊은 맛이 좋다며 딸과 사위에게도 권했는데 한 모금 마시더니 손사례를 치더니 맥주를 시켰다. 어쨌든 사돈 어른과 나는 백주로 하나되었다. 사돈 어른이 말씀을 정감있게 하셔서 금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분위기 메이커는 내가 아니라 사돈이셨다.



결혼을 앞두고 해랑이는 사돈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러 울산에 갔었다. 예비 시아버님과 어머님이 환대해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아버님이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닌데 해랑이 내려갔을 때 유쾌하게 대해 주셨다고 했다. 예비 사위가 우리 아버지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갸우뚱 거리며 설명해 주었다. 오늘도 정욱이 아버님은 유쾌하게 담소를 이어가셨다. 정욱이 어머님은 단아한 미소를 짓고 아버님의 술 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지면 아버님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건 우리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옆구리에 신호만 오지 않았으면 더욱 편안하게 취했을 것이다. 예전에 알던 사람처럼 편안하고 정감 어린 분위기가 이어졌다.



꽤 높은 도수의 백주 500cc 한 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신 다음 자리를 정리할 때 였다. 정욱이 아버님이 오늘 너무 좋은 만남이었다고 한 달 뒤에 울산에 초청하겠다고 했다. 상견례 자리에서 에프터 신청을 받은 셈이었다. 그게 한 달 전 이야기였고, 지난 주 토요일 울산에 갔다 왔다. 바다가 보이는 낭만 펜션에서의 추억 여행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미선로 교동길에서 3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