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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도 Aug 31. 2023

대청마루

여름만 되면 숨겨놓은 속살 드러내 보이듯, 활짝 열어 제 존재를 드러내는 한옥의 꽃이 있다. 겨울엔 무슨 얼음장 같은 추위로 본인을 감싸 사람들의 발길을 제지하고, 봄이 되면 겨우내 쌓였던 먼지도 털고, 묵었던 나무 향도 치우고 단장을 시작해 여름이 돼서야 그 민낯을 드러내 향기를 뿜어내는 곳. 대청마루였다.

나의 할아버지가 사랑하고 덕분에 내가 사랑한, 우리 집 대청은 늘 결이 부드럽고 차가웠다. 마루와 연결된 앞문, 툇마루와 붙은 뒷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대청에 누우면 여름을 잊는다. 앞뒤로 치고받는 바람이 중간에 만나 머물면서, 층고 높은 서까래를 돌고 내려와 대청마루를 울린다. 그 울림 위에 누우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땀에 폭삭 젖었던 등이 얼음 위에 지쳐진다.

지치는 얼음 위에 미끄러짐을 나는 사랑했다.     


당신들 걸음에 먼지를 날리고, 당신들 손짓에 나무의 결을 살리고, 시시로 하던 걸레질에 맨들맨들 윤이 났다.

때때로 문질러서 틈새 때를 벗기고, 기름칠도 듬뿍. 하셔서 더군다나 번들거렸다. 걸레질하다 혓바닥 내밀어 ‘헤’ 하면 못생긴 가시내도 똑같이 혀를 내민다. 어째 이리 거울 같을꼬 싶어 누워 등짝으로 석석 밀고 다녀본다. 발바닥에 닿는 마룻결의 시선들, 등을 밀고 있는 찹찹하면서 매끈거리는 마룻바닥은 나의 모든 시간을 담고 밀었다.

멀리 솟은 서까래의 웅장함은 내 그리움의 결이었을까. 아마도 못 믿을 어미를 향한 첫정이었을 게다. 낳은 지 한 달 만에 두고 갔다는 곳.

더위에 쪄 죽을까 봐, 걱정되어 대청마루에 두고 갔을까. 갓난아이가 온전히 바라봤을 저 서까래는 지금도 변함없이,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위안받고,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청의 서까래는 내게 또 다른 하늘이었다.

큰대자로 뻗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좋았고, 책을 읽으며 맞는 산들바람도 좋았다.

침 흘리며 자고 일어나도 춥지도 않았다. 대청에서 그러고 잠들면 입 돌아간다느니 감기 걸린느니 해도, 나는 입도 안 돌아갔고 여름감기도 한번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갓난아기였던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대청마루는 나를 지키고 있음이라.

걸레질하다 보면 오래 묵은 나무에서 올라오는 향이 있다. 오랜 나무의 향이고 고향의 냄새다. 킁킁 냄새를 맡고 얼굴을 대보면 차가운 느낌이 좋았고, 반질반질한 것이 괜히 좋아서 혀로 쓱 핥아도 보았다.

더럽게 마룻바닥을 핥는다고 등짝을 한대 얻어맞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래된 그네의 향기가. 그네가 담고 있는 할아버지의 향기가. 할아버지의 손길이, 그리고 나를 지키고 있는 그네의 정조가.          


뒤안을 향해 뻗은 대청 툇마루는 증조할머니의 공간이었다. 뒤안의 주인들이었던 항아리를 매일 닦고 열고 닫고 하는 것이 증조할머니 일이셨다. 나는 그저 한갓진 객으로 널브러져 뚜껑 열 때면 으레 따다 주시는 앵두에 행복하고, 뚜껑 닫을 때 치마에 문질러 주시던 대추에 세상이 빛났다. 툇마루는 대청에 딸린 작은 대청이었다.

좁지 않은 대청 툇마루는 대청마루와 같이 늘 호사였다. 거기다 증조할머니가 늘상 털고 마른 걸레질로 닦는 것이 일이었으니, 어쩌면 대청마루보다 더 아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그렇게 한갓진 객들이 와 널브러져 있을 정도의 자리를 내어주곤 했다.

작은 대청이었다. 높은 서까래 대신 파란 하늘이 보이는 또 다른 멋이 있는 대청이었다. 잠시 들르는 할아버질 위해서 나는 기꺼이 작은 대청의 객이 된다.

그 반질반질 윤이 나서 차가운 대청마루는 농사일에 지쳐 되다는 할아버지에게

나훈아의 구성진 소야곡을, 이미자의 애잔한 세레나데를 풀어내었다.

끝까지 듣지도 못하고 짧은 낮잠에 빠지는 할아버지를 위해 증조할머니와 나는 툇마루에 걸쳐 앉아 소리 죽인 수다를 떨었더랬다. 한여름 햇살을 잠시 잡아 감나무 아래 앉히고, 똥개인 메리는 작은 대청 아래 졸음을 흘렸다. 나는 소리를 더 죽인다.

목청 큰 나의 미련한 수다로 고된 농부의 짬과 설핏 쉬어가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는 안 될 것도 같아서.

딱딱한 목침 위에서 힘에 부쳐 늙어 가시던 할아버지 얼굴에서 잠깐의 생을 엿본다.

증조할머니가 슬쩍 덮어주시는 메마른 모시이불이 유난히 하얗다.




*원고 하나 준비해서 내느라 글을 올리지 못해 작은 메모 하나 씁니다.

그래도 가끔이나마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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