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미루나무
강소이(23년 한국문학상 대상 수상 시인)
그녀의 방문 앞에 누운 인왕산이
가을 마차를 끌고 가는 요란한 말처럼
부지런하게 다가오는 저녁이다
키 큰 나무들이 색색의 풍악 소리로 우짖는
무악재 고개
나뭇잎들은 새들의 신음 소리를 백 년이 넘게
가지 속에 몰래 감춰두고
오늘은 미루나무들 가로수로 열을 선다
그녀의 사랑이 익어가라고
나뭇잎들 바스스 바스러져 고요한 오늘
현저 고가 밑에 둥지 틀었던
비둘기 집에도 바람 인다
바스러지는 가랑잎의 사랑도
귀하고 귀하고 귀하거늘
고가 밑에 웅크린 그녀의 새들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염려하며
유난히 빽빽한 식빵 한쪽으로 식사를 마치고
목이 멘다
생수 한 모금 없는 그녀의 새들이 마실
지구 건너편에서도 목이 메일 때 나뭇잎에 내려앉은 새들이 산 그림자를 쪼고 있을 때
세상 어디쯤에선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있을 테다
이크, 인왕산 호랑이가
무악재 고개를 넘어오던 시절에도
키 큰 미루나무가 그녀의 방을 내려다보았을 테다 그녀의 오래된 사랑이 익어 가는 저녁을
이 가을에도
6시집 [다시 눈부신 하루]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