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깊은 상처, 그리고 화해의 시작
우리 엄마
나이가 들면서, 어릴 적엔 도무지 알 수 없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나 역시 엄마와 엮인 많은 상처를 가슴에 품고 지내왔다.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때 나는 깊은 조울증의 터널을 헤매었다. 그 시절의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고, 생각해 보면 그 상처의 깊은 뿌리는 엄마와의 관계에 닿아있었던 것 같다.
엄마와 늘 싸우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는 다섯 남매 중 둘째였고, 외삼촌은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자 삼대독자였다. 엄마는 어릴 때 언니와 싸우면 언니에게 덤볐다고 혼나고, 남동생과 다투면 독자에게 맞섰다고 꾸중을 들었다고 했다. 어린 엄마는 감정적으로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한 채 그렇게 자라왔다. 엄마는 강하고 자립적인 성격이었다. 그 작은 청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마는 서울로 향했다. 연고라고는 서울에 계신 외삼촌뿐이었고, 엄마는 홀로 낯선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게 엄마는 언제나 차가운 존재였다. 엄마는 무조건 이성적이었다. 내가 힘든 일을 겪으며 감정적인 위로와 애정을 갈망할 때조차 엄마는 늘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단순한 몇몇 순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 그랬다. 마음이 외로울 때 한두 번 정도의 위로 부재는 그냥 넘길 수 있지만, 그런 순간이 계속 반복되면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되는 법이다.
엄마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내 나름대로의 사고와 자아가 생겨났고, 엄마와 의견이 충돌할 때면 나는 논리와 합리성으로 내 생각을 뒷받침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엄마는 내 이해를 넘어서는 권위로 내 주장을 무시했고, 나는 언제나 그 권위 앞에 무력해졌다.
엄마는... 내가 가장 힘들 때에도 내 곁에서 마음으로 다가오지 못한 사람이었다. 정말 위로가 필요해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꺼내면 엄마는 오히려 내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엄마는 ‘먼저 공감하고, 그 후에 대안을 주는’ 법을 알지 못했다. 공감이 결여된 조언은 나처럼 감성적인 사람에게는 더 큰 상처로 남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 역시 점점 차갑고 단단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엄마에게 감정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나도 내 집에서 온전한 유대감을 찾지 못했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나 역시 그들에게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엄마는 한때 작은 부동산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때 재개발을 위해 주민들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나는 내 이름을 적지 않았다. 나와는 무관한 가족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작은 불만이 쌓이면서 나는 점점 가족의 의미를 놓아버리게 되었다. 이 마음은 오래도록 내게 남아 있었다. 부모님께 도움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 생각 하나로 오랜 시간을 버티며 살아왔다.
취업 준비를 하던 중, 나는 대전의 집에서 판교로 출근하게 되었지만, 그 소식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출근하신 틈을 타서 나는 조용히 짐을 꾸렸다. 가장 큰 우체국 상자에 모든 짐을 모아 문 앞에 두고, 조용히 집을 떠났다. 그렇게 부모님께 집을 떠난다는 글만을 남기고 홀로 나섰다. 어디서 살아갈지도 모르면서도, 그저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며, 나는 점점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원망만이 남았다. 코딩 테스트를 준비하다가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문득 엄마 탓을 하곤 했다. ‘내가 엄마 말대로 못난 사람이 아니었다면… 엄마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엄마란, 단순히 좋지 않은 관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가 원망하는 인생의 큰 부분이었다.
엄마와의 관계가 바뀌기 시작한 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였다. 그때 나는 결혼을 준비 중이었고, 결혼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엄마와의 서먹한 관계였다. 나는 내 아내가 될 사람에게조차 엄마를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 복잡한 감정 속에서 할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오래 우리 집에서 지내셨고, 나는 그 장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슬픔 속에서 나와 엄마는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는 그 3일 동안 우리 사이의 마음의 벽은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할머니는 96세라는 긴 삶을 사셨지만, 그 떠남 앞에서 나는 새삼 가족의 온기를 느꼈다.
엄마를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결혼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엄마의 모든 행동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무심히 내게 건네는 말과 행동도 이제는 ‘엄마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엄마와는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화를 나눈다.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가끔은 아내와 함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여전히 엄마는 때때로 날카로운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감정들이 오래 남지 않는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묻고 싶다. ‘더 빨리 독립했다면, 그때의 상처들이 더 덜했을까?’ 아니면 ‘엄마는 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엄마가 더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을까? 어쩌면 엄마도 스스로 받지 못한 것을 내게 전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엄마와 나 사이의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비록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들이지만, 이렇게 꺼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아픔과 상처는 내 삶에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고, 치유되어야만 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Believer’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