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안도현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서

by 꿈강

감동 없는 문학이 넘쳐나는 때일수록 진정성의 울림을 지닌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그런 시는 불현듯 우리의 무딘 일상을 충격하면서 일상 속에 잠재워진 진실 앞에 독자를 데려다 놓는다. 이렇게 보면 시는 일상성과의 싸움이며, 좋은 시는 그 싸움을 잘 치른 시에 다름이 없을 터이다. 안도현의 시는 이런 싸움의 맥락에서 감동적으로 읽힌다. 그 감동은 그의 시들이 진실을 잠재우는 일상성과의 싸움의 흔적을 두드러지게 간직하고 있는 한편, 그 싸움에서 찢기고 팬 상처를 진실을 향한 그리움의 언어로 차분히 감싸안는 데 성공하고 있는 데서 온다.


손경목 문학평론가의 시평이다. 안도현의 시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성싶다. 자, 이제 그의 시를 만나러 가 보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안도현, <연탄 한 장> -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끝을 알알하게 쏘고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 안도현, <마늘밭 가에서> -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

일렬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

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 처음 건너는

아이들 같구나

너희도 저녁밥 먹으러 가느냐

날 추운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

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

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

못 했는가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구나

- 안도현, <먼 불빛> -



완주군 동상면 들어가는 입구에

저 밤나무숲이 무성하게 풀어놓은

밤꽃 냄새

퍽 징하네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남의 코를 찌르는가 보네

인간도

가장 오래 헤맨 자의 발바닥이

가장 독한 냄새를 풍기는 법


나는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여태 무슨 냄새를 풍기고 있었나

단단한 밤 한 톨 끝내 맺지 못하더라도

저물어 하산하기 전까지는

독해져야겠네 자네한테 말고

오늘 나 자신한테 말이야

- 안도현, <이 세상에 소풍 와서> -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 비리며 공직자 재산 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 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 확인란에

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 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 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짝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사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 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보지만 아 글쎄, 이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 못 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짓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또 열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은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을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는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좋을 것을

죽은 듯이 쓰러져 이미 몸 한쪽이 썩어가고 있다는 듯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라는 듯이 코를 처박고

엎드려 있어도 될 것을 나무는

한사코 서서, 나무는 버틴다

체제에 맞서 제일 잘 버티는 놈이

제일 먼저 눈밖에 나는 것,

그리하여 나무는

결국은 전 생애를 톱날의 아구 같은 이빨에 맡기고 마는데,


여기서 나무의 생은 끝장났다네, 저도 별수없지, 하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끌려가면서도 나무는 버틴다

버텼기 때문에 나무는 저를 싣고 가는 트럭보다 길다

제재소에서 토막토막으로 잘리면서 나무는

뎅구르르르 나뒹굴며

이제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 한다

나무는 버틴다

- 안도현, <나무> -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숲길ㅇ르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구 멀쑥한 백양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 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 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세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연애 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 뭐니 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 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 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 안도현, <자작나무를 찾아서> -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 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안도현, <우물> -



강물은 어금니 악물고 결심했을 것이다

들녘이 넓다는데

도대체 얼마나 넓은지 직접 한번 측량해 보겠다고

고심 끝에 강둑을 왈칵 밀어젖혔을 것이다

들에 큰물이 졌구나

어머니가 일찍 나를 깨운 아침

나는 동네 어귀까지 밀려든

자기 몸으로 세상을 다 이룬 그 흙탕물이

눈부셔서

강물이 그렇게 자랑스러웠지만

내 삶이 홍수로 때 아닌 집중 피해를 당하는 건

솔직히 겁났던 게 사실이다

상류에 댐이 막아서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은 것들 많아도

기어이 참고 또 참아야

어른이 된다기에

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 안도현, <홍수> -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다면


어른들도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없으므로 교육도 없을 것이다

교육이 없으므로 교과서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가 없으므로 시험도 없을 것이다

시험이 없으므로 대학교도 없을 것이다

대학교가 없으므로 고등학교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가 없으므로 중학교도 없을 것이다

중학교가 없으므로 국민학교도 없을 것이다

국민학교가 없으므로 운동장도 없을 것이다

운동장이 없으므로 미끄럼틀도 없을 것이다


미끄럼틀을 타고

매일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부신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 안도현,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다면> -



다 내놓으라고

간밤에 그렇게 떼를 쓰던 눈보라에게

인간들은 하나도 빼앗기지 않고

몽땅, 그 순결을 빼앗아

독차지하였구나

- 안도현, <눈 그친 들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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