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
나희덕의 시는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이 생애에 대한 안타까운, 그러나 따스한 응시의 눈길을 담고 있다. 그의 많은 시들이 비애를 말하지만, 그 비애를 차분히 감싸는 것은 지상에 뿌리내린 작은 것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 그리고 작은 것들에 숨 쉴 곳을 내주려는 흔연한 자기 비움의 자세이다. 그때 그의 시는 굳기 쉬운 심상들의 가두리를 넘어 넓게 번지면서 우리의 메마른 삶을 적실 물기를 얻는다. 나희덕의 시는, 그의 한 시구처럼, 울음 끝에 고요해진 맑은 눈동자 같다.
위 시평을 길라잡이 삼아,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음미해 보자. 시평은 한번 쓱 읽고 아, 그렇군 정도의 느낌만 가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시가 있느냐 하는 것이리라.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순간, 세상사로 어지러워진 마음이 차분해지고 다시 세상과 마주할 힘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을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을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
가로수 그늘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 몇 개가 떨어졌는지
잡풀 뒤에 숨어서 누가 울고 있다
쓰르라민가, 풀무친가, 아니면 별빛인가
누구인들 어떠랴
머리를 가득 채우는 저 소리,
충만을 이내 견디지 못하는 나는
다시 하늘을 본다
눈 멀어지니 귀도 멀어졌다
그러나 소리 희미해질수록
마음은 가까워졌다
소리는 풀잎 뒤에서가 아니라
내 마음 어느 갈피에서 나는 것 같다
소리 내는 그것을 만져보려고
풀잎을 쓰다듬으니 소리는 온데간데없다
가까이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들이여
내 안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들이여
너는 해진 옷 끌고 와 여기서 울고
나는 그 옷자락이나 만지다 돌아갈 뿐
사라진 그 소리에
잠시 기대어 앉아 있을 뿐
- 나희덕, <소리에 기대어> -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것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 나희덕, <기억의 자리>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희덕, <못 위의 잠> -
저무는 봄날 하얀 비 맞으며
나는 그 길 위로 걸어왔습니다
숨 막힐 듯 단내 나던 꽃송이
산산이 부서져 뼛가루처럼
어디론가 불려 가는 날,
마른 꽃잎을 한 줌 움켜보니
금방이라고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한숨을 잘 쉬시던지
모두 여기 날아와 쌓인 듯합니다
한숨 한 줌
이렇게 되려고 달려온 건 아니었는데
머리 위의 꽃비 하염없습니다
- 나희덕, <아카시아> -
나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 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했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 나희덕, <흐린 날에는> -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밥그릇을 받아놓고는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갈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은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그리고 그리고 기울고 싶다
- 나희덕,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나희덕, <배추의 마음> -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집에 갇혀 있던 흙들은 수십 년 만에 풀려나와, 햇빛을 껴안아본다, 그러나 이내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가, 더 견고한 벽 속에 갇히기를 기다리며 푸석해진다, 휘어진 철근 사이, 콘크리트 덩이들이 먹다 남은 살점처럼 걸려 있고, 반쯤 깨어져나간 항아리가 하늘을 벌써 몇 입 베어 먹었다, 햇살을 찡그리며 그 칼날 위에 눕는다, 내일은 어느 집이 헐려나갈까, 내 몸이 나를 모르듯, 저 낡은 지붕들도 제 때를 모르고,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던 늙은 손도 그 끝을 모르고, 다만 내일이라는 믿음이 벽을 낳고, 새로운 지붕을 낳고, 흙은 다시 그 속에 갇혀 마음으로나 쑥갓 상추 따위를 기르겠지, 큰 희망이 작은 희망을 내쫓고, 높은 지붕이 낮은 지붕을 삼키며, 끊임없이,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곳에서
- 나희덕, <신정 6-1 지구> -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나희덕, <귀뚜라미> -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 나희덕,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 나희덕, <태풍> -
아직은 문을 닫지 마셔요 햇빛이 반짝거려야 할 시간은 조금 더 남아 있구요 새들에게는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고 해요 저 궁창에는 내려야 할 소나기가 떠다니고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들이 저 멀리서 흘러오네요 저뭇한 창밖을 보셔요 혹시 당신의 젊은 날들이 어린 아들이 되어 돌아오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즈막 지치고 힘든 날들이었지만 아직은 열려 있을 문을 향해서 힘껏 뛰어오고 있을 거예요 잠시만 더 기다리세요 이제 되었다고 한 후에도 열은 더 세어보세요 그리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들은 아무것도 내쫓지 마셔요 어둠의 한 자락까지 따라 들어온다 해도 문틈에 낀 그 옷자락을 찢지는 마셔요
- 나희덕, <해질녘의 노래> -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 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 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나희덕, <길 위에서> -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 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레 울었던 매미처럼
둥치 아래 허물 벗어두고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 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 나희덕,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