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정호승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by 꿈강

문학평론가 김현은 정호승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호승 시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애나 한과 같은 감정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독특한 것은 비애나 한이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능동적 감정의 뿌리라는 것이다. 그의 비애나 한은 눈물이 아니라 칼이다.


자, 이제 정호승의 시를 만나 보자. 마음을 울리는 시가 꼭 있기를 기원한다.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정호승, <슬픔으로 가는 길> -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여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품을 칼을 꺼내어 눈에 대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



무악재를 넘으며 너는 오라.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봄밤에

우리들 슬픔의 해방을 위하여 오라.

그리움과 목마름 그 수군거림을 떨치고

사육신 묘지 앞을 기웃거리다가

낚시꾼이 별을 낚는 한강을 건너

무악재의 개나리로 피어 오라.

어디론가 끌려간 내 벗들을 거느리고

새벽거리에 쌓인 순결의 쓰레기 더미를 지나

젊은 넝마주이의 꿈으로 오라.

지난겨울 연탄불을 피워 놓고

홀로 죽은 내 아버지의 최후를 위하여

가발공장 기숙사 담벼락에 깔려 죽은

어린 소녀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위하여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떨어져 내린

애통한 청년의 빈 술잔을 위하여

이 불행한 우리들의 애인을 위하여

너는 반드시 새벽 봄길로 오라.

안기면 안길수록 꽃잎이 되는 너의 가슴을 열고

무악재를 넘으며 개나리를 헤치며

너는 마침내 오라.

- 정호승, <유관순(柳寬順) 9> -



별에다 입술을 대어 보아라.

서로 사랑한다 말하지 않게 된다.

당신의 문패가 지구 아래로

호올로 툭 떨어져 내릴 때

서로 미워한다 말하지 않게 된다.

사랑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슬픔을 만든 산에 가 보아라.

서로 사랑한다는 말만 쌓이어

흰 산새 등 위에 슬픔은 엎드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은

별이 보이지 않아 산을 만든다.

홀로 있는 당신이 여럿 있어도

별에다 가슴을 대어 보아라.

당신의 가슴이 사과 한 알로 떨어질 때

서로 사랑하라 말하지 않게 된다.

- 정호승, <옥중서신(獄中書信) 1> -



죽은 그대 켜놓고 간 촛불을 따라

더듬더듬 거울 속을 따라 들어가

사과나무 새들의 흰 새똥이

촛물처럼 떨어지는 거울 밖으로

치마폭에 고인 눈물 버릴 수 없다.

촛불을 들고 거울 밖으로

울며 울며 나오는 어린 소경의

봄밤 피리 소리 들을 수 없다.

피리 불던 입술이 굳고 굳어서

바늘 찔린 손톱마다 너무 아파서

이제는 피리 구멍 막을 수 없다.

어느 날 거울 속에 돌이 날아와

깨어진 조각마다 흩어진 불꽃.

지팡이는 타서 오직 재가 되어서

웅성웅성 봄눈 내리는 거울 조각 밖으로

지팡이 두드리며 찾아갈 수 없다.

- 정호승, <촛불을 들고 거울 밖으로> -



네가 날으는 곳까지

나는 날으지 못한다.

너는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만

나는 집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네 가슴의 피는 시냇물처럼 흐르고

너의 뼈는 나의 뼈보다 튼튼하다.

향기를 먹는 너의 혀는 부드러우나

나의 혀는 모래알만 쏘다닐 뿐이다.


너는 우는 아이에게 꿀을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단 꿀을 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너의 꿀을 만들지 못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겨울 꽁꽁 언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달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달디단 꿀이다.


저녁이 오면

너는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 정호승, <꿀벌> -



나에게

녹슨 할배 낫 한 자루 버려져 있다.

삼경(三更) 지난 초승달 등에 지고

낫을 갈던 긴 그림자 내려앉는다.

아버님 징용 떠나던 밀밭 이랑 사이로

울며 울며 떼 지어 지나가던

학도병 그 울음소리 내려 깔린다.

낫 놓고 기역자 모르던 할배는 그날

숫돌에 눈물 뿌리며 낫을 갈았다.

낙동강 언 기슭 쏟아지는 달빛

써억 썩 썩 소작인의 낫을 갈고 갈았다.

흰 대님 하늘에 풀어날리고

나는 들에 나가 푸른 꼴을 베어야 한다.

꼴을 베며 죽은 할배 만나야 한다.

낫을 등지고 떨어지는

적삼빛 저 노을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할배 무딘 낫날 흐느끼기 전에

대장장이 오랜 손힘 굳어가기 전에

나는 들에 나가 낫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낫질을 할 때마다 송아지 뿔은 자라고

소나기 뒤 낫날에 무지개가 아롱진다.

저녁나절 꼴을 지고 산을 내려와

나는 낫을 들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할배가 내 낫을 빼앗아 들고

지주들 푸른 하늘 잘라버린다.

숫돌에 피눈물 솟아 흐르고

삼경 지난 달빛 솟아 꽂힌다.

아버님 징용 떠난 밤하늘 높이

자루 빠진 낫 하나 버려져 있다.

- 정호승, <낫> -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여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 보소서.

- 정호승,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 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 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 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슬픔 많은 세상도 아름다워라.

- 정호승, <슬픔 많은 이 세상도> -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에 와닿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