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에서

by 꿈강

문태준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해 동안 쓴 것을 이렇게 한 권으로 묶으니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홀가분하다.

시에게 간소한 언어의 옷을 입혀보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 않았나 싶다. 대상과 세계에게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


마음에 와닿는 시가 여기저기에서 별빛처럼 쏟아져 내릴 듯하다. 만나보러 가자.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문태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 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 단

- 문태준, <묶음> -



나목이 한 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한 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 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나는 이 조용한 칸에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오전의 시간은

언덕을 넘어 평지 쪽으로 퍼져 금세 사라진다

- 문태준, <어느 겨울 오전에> -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 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 문태준, <조춘(早春)> -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 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축축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 문태준, <나는 내가 좋다> -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

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노인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

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

그러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

팔을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

노인의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 문태준,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



아침에 단풍을 마주 보고 저녁에 낙엽을 줍네

오늘은 백옥세탁소에 들어 맡겨준 와이셔츠를 찾아온 일밖에 한 일어 없네

그러는 틈에 나무도 하늘도 바뀌었네

- 문태준, <가을날> -



이 수풀은 새소리 하나 일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수풀에서 새의 둥지를 다 훔쳐가 버렸습니다 빈 그릇으로 자루에서 쌀을 퍼 덜어냅니다 물을 떠 온 후 내에 가서 아직 눈이 소복이 덮인 흰 돌과 물의 흐르는 발목을 보고 돌아옵니다 나의 폐는 폐옥이지만 미미하게 새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제게 빛은 넘칩니다 넘치는 빛에 갓 생겨난 근심이 비치다 사라집니다

- 문태준, <외딴집> -



꽝꽝 얼어붙은 세계가

하나의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아버지가 무 구덩이에 팔뚝을 집어넣어

밑동이 둥글고 크고 흰

무 하나를 들고 나오시네


찬 하늘에는

한 동이의 빛이 떠 있네


시래기 같은 어머니가 집에 이고 온

저 빛

- 문태준, <겨울 달> -



숲에 새집이 이처럼 많았다니

높은 고립이 이처럼 많았다니


동트는 숲 위로 날아오른

은사(隱士)들은

북쪽 하늘로 들어가네


풍막(風幕)을 이쪽 겨울에 걸어놓은 채


풍막은 홀로 하늘 일각(一角)을 흔드네


음지에는 잔설이 눈을 내리감네

- 문태준, <겨울 숲> -



귓가에 조릿대 잎새 서걱대는 소리 들린다

이 소리를 언제 들었던가

찬 건넛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자매가 가끔 소곤대고 있다

부엌에는 한 알 전구가 켜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어머니는 조리로 아침쌀을 일고 있다

겨울바람은 가난한 가족을 맴돌며 핥고 있다

- 문태준, <내 귓가에> -



물이 물과 함께


가난한 자매처럼


시오리를 걸어서


섬돌 아래에 와


괸 저녁처럼


웅크려 앉은 여기


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여기


손이 트기 시작하는


늦가을


물결처럼


뒷등에

- 문태준, <호수---수변시편 1> -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 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반대편으로 가네

이 모든 것과의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異國)으로 가네

낯선 시간, 그 속의 갈림길

그리고 넓은 해풍(海風)이 서 있는 곳

- 문태준, <여행자의 노래> -



날고 있는 잠자리와 그 잠자리의 그림자 사이 대기가 움직인다 이리저리로 날고 있는 잠자리와 막 굴러온 돌을, 앉은 풀밭을, 갈림길을, 굼틀굼틀하는 벌레를 이리저리로 울퉁불퉁 넘어가고 있는 그 잠자리의 그림자 사이 대기가 따라 움직인다 대기는 둘 사이에 끼여 있지만 백중한 둘을 갈라놓지는 않는다

- 문태준, <대치(對置)---드로잉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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