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에서

by 꿈강

시집 <그늘의 발달>에는 소박하고 평화롭고 정감이 가득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지만, 시인의 조명이 없었다면 잃어버렸을 세계이다. 삶의 감각, 사물의 감각, 언어의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 세계는 사소하고 숨어 있는 섬세한 감각이 얼마나 우리 삶의 깊은 곳을 관통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소용돌이치는 세상살이의 급류 속에서 이 감각들은 조용히 가라앉아 따뜻하게 위무하는 보드라운 언어들을 솟아나게 한다. 시의 깊이는 감각의 깊이이고 삶의 깊이이다.


시평(詩評)대로 시를 통해 소박한, 평화로운, 정감이 가득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아니 좋으랴. 시를 읽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문태준의 시를 만나러 가 보자. 삶의 깊이를 더해 보자.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귀가 대신 가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

꽃이 피었다고

어치가 와서 우네

벌떼가 와서 우네

한 송이 꽃 곁에 온

반짝이는 비늘들

소리가 골물처럼 몰리는 곳

한 송이 꽃을 귀로 보네

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당신의 은밀한 농담들,

소리의 침실들, 그러나

끝이 있는 사랑의 악보들

의자를 꽃 가운데 놓고

내 몸에 수의를 입히듯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

- 문태준, <한 송이 꽃 곁에 온> -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 문태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 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 문태준, <백년(百年)> -



사랑의 농원에 대하여

생각하였느니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나의 하루와 노동은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흘러 흘러갔어라,

먼 산 눈이 녹는 동안의 시간이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풀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풀이 와

어떤 곳으로부터 와


풀은 와서 돋고

몸이 커지고 스스로

풀꽃을 피우고 문득

여인이 되었어라


수심(愁心)을 들고 바람 속에 흔들리거나

내가 돌아앉으면

눈물을 달고 어룽어룽 내 뒤에 서 있었어라


어디로부터 왔느냐

묻지는 않았으니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듯이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앞서고 앞서서 가거나

늦추고 늦추어서 갈 뿐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서로에게 구름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애인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그러하니 사랑이여,

우리가 만나는 동안은

샘물을 길어서

주름을 메우고

서로의 목을 축여다오

- 문태준, <화분> -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 문태준, <그늘의 발달> -



저녁이 다 오고

강아지들이 어미의 젖을 찾는 것을 본다

어미는 저녁처럼 젖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고

눈을 못다 뜬 다섯의 강아지들은

머리통을 서로 밀고 찧으며

저녁밥을 찾는다

어디 다른 데에서 목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저것이 평생이다

- 문태준, <평생(平生)> -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줄어들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 문태준, <흔들리다> -



호박꽃 속을 한결같이 맴도는 호박벌처럼


젖을 빨다 유두를 문 채 선잠 든 아가처럼


나오지 아니하고 그 통통한 살내 속에 있고 싶은

- 문태준, <사랑> -



산골 납작집 할매가 산길을 걸어 내려와 고갯길을 넘어올 완행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참빗을 곱게 내리는 햇살 속에 시간이 오고 있다

내일이 오고 있다

머릿수건을 머리에 올려둔 채

버스가 이곳서는 좀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는 동안

보퉁이에선 산당귀 내음새가 긴 명(命)처럼 흘러나왔다

납작집의 가을에는 네 홉의 여치가 울고 염소가 울 것이다

- 문태준, <내일 1> -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 문태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



술 받으러 구멍가게에 갔다 덜컥 개에게 물렸다

헐렁한 몸뻬의 여주인이 개에게

이 계집이, 이 다 큰 계집이,

야윈 어미 개를 내 앞에서 큰딸 혼내듯 했다

내게 되레 잘못한 일이 있었나 뜨끔했다

술을 받아 나올 때 여주인은

여태 눈도 못 뜨는 두 마리의 하얀 새끼 개를 들어 보였다

따뜻한 배를 각각의 손으로 받쳐 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겨우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

- 문태준, <물린 값으로> -



남해 용문사

마루 끝에서 듣는

새 우는 소리


맑고 참 곱다


바람이 빨라 그렇단다


손 덜 타게

얼른얼른

바람이 건네주느니


종심(從心)이려니


바람의 이 일을

나도 하고자

- 문태준, <바람의 일> -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 문태준, <봄볕> -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귀 떨어진 밥그릇 하나 들고


빛을 걸식하였네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알몸으로 누워 있으며


매미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배 속의 아가처럼 귀도 눈도 새로이 열렸네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

- 문태준, <극빈 3―― 저 들판에> -



울고 우는 새는

떨어져 사는 사람

산(山)을 주고받아요


나는 저무는 길섶 마른 풀잎서 반짝이는

흔한 풀벌레


이별은 내 삶의 선몽(先夢)

이제 어디서든 이별을 할 수 있고


외로우면 조금 나와서

조금 흔들려요


크고 오래 쓴 채반을 인 사람처럼

한 덩이로

가는 시간

- 문태준, <크고 오래 쓴 채반을 인 사람처럼> -



벽에 셔츠가 걸려 있다

겨드랑이와 팔 안굽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

바람과 구름이 비집고 들어가도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작은 박새도 도로 날아 나온다

저 옷을 벗어놓은 몸은

오늘 밤을 자고 나도 팔이 아프겠다

악착같이 당기고 밀치고 들고 내려놓았을

물건들, 물건 같은 당신들,

벽에 셔츠가 비뚜름히 걸려 있다

오래 쥐고 다닌 약봉지처럼 구겨진 윤곽들,

내심(內心)에 무언가 있었을,

내심(內心)으론 더 많은 구김이 졌을

- 문태준, <구겨진 셔츠> -



울타리를 치고

들어앉으니


나의 사랑은

뼈와 살로

외곽을 만들어

그 안쪽

인색하고

붉고

조마조마하는

심장 같아라


외곽을 갖춰

나갈 곳도

누굴 향하는 마음도 없이


어제 문득

산곡(山谷)에서 보았다


조그마한 꽃봉오리가

수줍게 피면서

조금조금

외곽을 넓히는 것을


내일에는

그예 그이의 산골(散骨)을 보리니

꽃은 지면서

사랑의 외곽을 마저 허물다

- 문태준, <사랑의 외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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